역사인물 연대표 - 데이터(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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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단군
start: -2333 (조선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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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단군조선, 고조선,군주,신화, 무속,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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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檀君 또는 壇君)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한민족의 신화적인 시조이자 고조선의 건국자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시조로 추앙 받았으며 대종교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환검(桓儉)이라고도 한다. 단군은 직책으로 보이며 왕검, 왕험(王儉)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역사서중에 하나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나오는 한민족의 으뜸가는 조상의 이름이다.

title: 위만
start: -194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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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조선, 군주, 위만조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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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만(衛滿, ? ~ ?, 재위: 기원전 194년경 ~ 기원전 2세기)은 중국 연(燕)나라 사람으로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위만조선의 초대 국왕이다.

title: 동명성왕 (주몽)
start: -58
end: -19-9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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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부여, 고구려,  왕,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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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성왕(東明聖王) 또는 추모왕(鄒牟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은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이다. ≪국사 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추모(鄒牟)’ 또는 ‘상해(象解)’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휘는 주몽(朱蒙)으로, 추모(鄒牟), 중모(中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도모(都牟), 도모(都慕)라고 한다. 시호는 "동명성왕"은 성스런 덕(聖)을 이은 왕(王)이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상해의 상(象)은 중(衆)자의 오기로부터 유래일 수도 있다. 부여의 건국자인 동명과 주몽은 별개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여의 금와왕 재위 시 금와왕의 아들 대소에 의해 핍박받던 주몽은 박해를 피해 남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title: 광개토왕
start: 374
end: 412 (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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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구려, 군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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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2년?, 재위: 391년 ~ 412년?)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진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는 연호인 영락(永樂)을 왕호로 사용한 영락태왕(永樂太王) 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으로 알려져 있다.
	
	391년부터 412년까지 재위하는 동인 391년부터 411년까지 친정하였고 411년부터 이듬해 412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고거련(훗날의 장수왕)이 왕태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title: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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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67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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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신라, 화랑, 한국, 장군,가야, 왕족,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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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음력 7월 1일(양력 8월 18일))은 신라의 군인 겸 정치가이자 외척이었다.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眞平王)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후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title: 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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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68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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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종교인, 신라, 승려, 학자, 왕족, 시인, 사상가, 철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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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title: 계백
start: 660-8-20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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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백제, 군인, 장군,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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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백(階伯, ? ~ 660년 8월 20일(의자왕 20년 음력 7월 9일), 일명은 堦伯(계백), 階升(계승))은 백제 말기의 장군이다. 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논산 황산벌에서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부여성충, 흥수와 함께 백제의 3충신이라 불리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title: 발해 문왕(대흠무)
start: 737(재위)
end: 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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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발해, 왕,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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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왕(文王, ? ~ 793년, 재위: 737년 ~ 793년)는 발해의 제3대 국왕으로, 휘는 흠무(欽茂), 연호는 대흥(大興)이다. 황후는 효의황후(孝懿皇后)로 룽터우산 고분군 M12 묘지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존호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다.
	

title: 김헌창
start: 822 (죽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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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신라, 왕족, 정치인,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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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창(金憲昌, ? ~ 822년)은 신라의 왕족이다. 태종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혹은 3남 문왕)의 4대 손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아들이다. 관등은 이찬이었으며 시중(侍中)을 역임하기도 했다.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도독으로 있으면서 신라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한 달만에 진압되었다. 그가 일으킨 반란은 오늘날 하대신라의 왕위 계승을 두고 그때껏 숨겨져 있던 모순이 폭발한 사건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title: 고려 태조
start: 877-1-31
end:  94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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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군인, 한국, 장군, 고려,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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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太祖, 877년 1월 31일 (음력 1월 14일) ~ 943년 7월 4일 (음력 5월 29일))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의 초대 왕(재위기간 :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약천(若天),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이다. 연호는 천수(天授)이다.
	
	송악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가 되었다.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의 상주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를 공략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 홍유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이 경주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와 병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경순왕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를 내려주고, 정승공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918년부터 943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918년 나주도대행대시중 구진(具鎭)과 국구 유금필(庾黔弼)이 잠시 순차적으로 대리청정하여 국정을 담당했고 같은 해 918년부터 943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title: 김부식
start: 1075
end: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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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려, 유학자, 문신, 작가, 시인, 한국, 역사가, 정치가,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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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부식(金富軾, 1075년 ~ 1151년)은 《삼국사기》를 쓴 고려 시대 학자·문신·역사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鄭襲明), 김효충(金孝忠)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title: 정서 (고려)
start: 1151 (대령후 사건)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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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한국, 고려, 문신, 시인,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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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서(鄭敍, ? ~ ?)는 고려 인종 때의 문인이다. 본관은 동래, 아명은 사문(嗣文), 호는 과정(瓜亭)이다. 
	
	고려사에 입전된 문안공 정항(鄭沆)과 개성 왕씨의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음서로 관직을 시작하여 내시원 내직(內直)이 된 뒤 내시낭중까지 올랐다. 
	
	인종의 왕비인 공예태후의 여동생이 바로 그의 아내인 관계로 인종과는 동서간이 된다. 글과 그림이 뛰어나 인종의 신임을 받았다. 
	
	1151년 의종 때 문관인 내시원 내직과 환관인 액정국 내료간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대령후 사건이 발생하자 내료의 거두인 정함·김존중 등의 모함으로 동래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연군의 정을 읊은 <정과정>을 지어 유명하다.
	
	그러나 조정내 문관계인 내직세력이 약화되어 점차 환관계인 액정국 내료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환관세력의 거두격인 내전숭반(內殿崇班) 정함이 문관세력인 내직세력의 힘을 완전히 약화시키려는 음모로 인해 다시 거제도로 귀양지를 옮겨야 했다. 
	
	1170년 명종 때 죄가 풀리어 다시 등용되었다. 

title: 김방경
start: 1212
end: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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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려, 무신,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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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경(金方慶, 1212년 ~ 1300년)은 고려 말기의 원종 때부터 봉공한 명장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이며 안동 김씨의 중시조이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김효인(金孝人)의 아들이다. 
	김사렴, 김사형의 4대 선조이다.

title: 최해
start: 1287
end: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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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려,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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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해(崔瀣, 1287년~1340년)는 고려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언명부(彦明父), 호는 졸옹(拙翁), 본관은 경주이다.
	
	최치원의 후손이며 충숙왕 때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을 지냈다.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검교·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그는 특히 고려의 저명한 문인들의 글을 모아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찬하였으며, 당대의 문호로서 이제현과 함께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졸고천백(拙藁千百)》《농은집》《귀감》 등이 있다.

title: 이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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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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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고려,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외교관, 시인, 역사가,서예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이제현(李齊賢, 1287년 ~ 1367년)은 고려후기의 시인·문신·성리학자·역사학자·화가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다. 

title: 조선 태조
start: 1335-10-27
end: 1408-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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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한국, 조선, 왕, 군인, 군주
description: 
	조선 태조(朝鮮 太祖, 1335년 10월 27일 (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18일 (음력 5월 24일), 재위 1392년 8월 5일 (음력 7월 17일) ~ 1398년 10월 14일 (음력 9월 5일))는 고려 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초대 왕이다. 함경도 영흥 출신이며,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고려에서 관직은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고려 우왕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문하시중으로서 전권을 장악하고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양위의 형식으로 조선을 개국하였다. 원래 이름은 성계였으나 조선건국 후 단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했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시호는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고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폐지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약 10년 동안 있었다. 향년은 74세이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title: 정도전
start: 1342
end: 1398-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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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고려, 문신, 정치인, 유학자, 외교관, 철학자,조선, 성리학자,문인, 작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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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鄭道傳, 1342년~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무신(武臣), 유학자(儒學者)이자 시인(詩人)이며, 외교관(外交官), 정치가(政治家), 유교 사상가(儒敎 思想家), 유학 교육자(儒學 敎育者)이다. 조선의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三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별칭은 해동장량(海東張良)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과 제2차 요동 정벌(1392)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폄하되었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title: 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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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려, 문신, 무신, 정치인,조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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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준(趙浚, 1346년 ∼ 1405년)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시인(詩人), 무신(武臣), 정치가(政治家)이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이다. 작위는 충의군(忠義君),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고 조연(趙璉)의 손자이며 판도판서를 지낸 조덕유(趙德裕)의 5남이고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의 부군 조대림(趙大臨)의 아버지이다.

title: 하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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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륜(또는 하윤, 河崙, 1348년 1월 22일(1347년 음력 12월 22일) ~ 1416년 11월 24일(음력 11월 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자는 대림(大臨) 또는 중림(仲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부사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다. 고려 말 정몽주, 남은, 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처음에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1393년 정도전이 쓴 표전문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홍무제가 문책하자 직접 명나라에 가서 사태를 해결하였다. 1398년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안대군 이방원을 도왔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당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1416년 관직에서 은퇴 후 객사하였다. 이인복, 이색의 문인이다.

title: 조선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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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문자 발명가,한글학자, 언어학자, 유학자,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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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7일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姓)은 이(李), 휘(諱)는 도(祹),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자(字)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이다. 세종은 묘호(廟號)이며, 조선에서 올린 시호(諡號)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므로 존시를 합치면 세종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 된다. 명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과 어머니 민씨(閔氏)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군 이보(孝寧君 李 補)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이제(李 褆)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沈溫)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 경제, 국방,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주시경(周時經)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에 출몰하는 여진족(女眞族)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倭寇)를 토벌하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붕어할 때까지 첫째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 인물이다. 2012년 7월 1일, 그의 묘호를 딴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가 출범하였다.

title: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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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의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title: 김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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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성리학자, 역사가, 교육인,갑자사화,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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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손(金馹孫, 1464년 ~ 1498년 7월)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禍)를 입었다. 

title: 조광조
start: 1482-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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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후에 기묘명헌 중 한 사람이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title: 유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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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정치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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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대 성리학 연구와 학술 진흥에 기여한 호남 사림
	
	유희춘(柳希春, 1513년~1577년)은 조선의 문신. 자는 인중, 호는 미암,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title: 이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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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인(奇人)인가, 실학의 선구자인가
	
	이지함(李之菡, 1517년~1578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이다. 친형 성암 이지번의 문인이다. ‘토정’이라는 호는 그가 마포 나루에 ‘토정’이라는 흙집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인과 북인의 당수인 아계 이산해는 그의 문인이자 조카였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白玉軒) 이개는 이지함의 종증조부가 된다.

title: 김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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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 분당의 발단이 된 신진 사림의 영수
	
	김효원(金孝元, 1542년 ~ 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파 관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외척임을 들어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년 간 한직(閒職)을 전전했다.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직에 천거되자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심의겸과 심충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들로, 선조가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인정되었다.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교산 허균과 허난설헌의 인척으로, 허균은 그의 사위이며 허균의 형 허봉의 딸이 그의 맏며느리였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청렴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황, 조식의 문인.

title: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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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description: 
	율곡 이이의 구체제 혁신론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 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붕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 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휴암 백인걸의 문인이다.

title: 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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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한의학,조선, 의사, 문신, 의학자, 한의사,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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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의학의 완성
	
	허준(許浚, 1539년 ~ 1615년)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생전의 관직은 숭록대부 양평군에 이르렀으며, 사후엔 정1품 보국숭록대부 양평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허곤(許琨)의 손자이며, 용천부사(龍川府使) 허윤(許碖)의 둘째아들이다.

title: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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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무신, 제독, 장군,해군, 군인, 한국
description: 
	이순신(李舜臣, 1545년 (인종 원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 1598년 (선조 31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 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title: 조선 선조
start: 1552-11-26
end: 1608-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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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왕,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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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릉성세(穆陵盛世)의 중흥군주
	
	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임금(재위 1567년~1608년)이다. 성은 이(李), 휘는 연(昖),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첫 작위는 하성군(河城君)이었고, 사후 시호는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며 이후 광해군 때 묘호를 선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 올려서 최종시호는 선조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다.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아들로서, 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이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개인적으로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1567년 8월부터 1608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567년 8월부터 이듬해 1568년까지 이복 숙모 인순왕후 심씨가 섭정을 하였고 1568년부터 1608년까지 친정하였으며 같은 해 1608년 3월 붕어할 때까지 둘째 서자 광해군 이혼이 왕세자 신분으로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다.

title: 강홍립
start: 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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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군인, 장군,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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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청 교체의 격랑 속에서 고투한 경계인
	
	강홍립(姜弘立, 1560년 ~ 1627년)은 조선의 문관, 군인이다. 광해군 때 명나라에 지원병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청나라와의 교전을 피하다가 거짓으로 투항하기도 했다. 자 군신(君信), 호 내촌(耐村),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title: 허균
start: 156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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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조선, 문신, 정치인, 작가, 소설가, 유학자, 문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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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許筠, 1569년 12월 10일(음력 11월 3일) ~ 1618년 10월 12일(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 시인이었다. 서자를 차별 대우 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으며, 작품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성수(惺叟)로 불렸고 후에는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불렸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을 야기(惹起)하기도 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로 활동하였으나 1617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으로 가담하였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었다. 홍길동전과 성소부부고 등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는 동인이었으며 북인, 대북으로 활동하였다. 초당 허엽의 아들로, 허성의 이복제(異腹弟)이자 허봉, 허난설헌의 친제(親弟)이다. 우성전은 그의 이복 매부였다. 손곡 이달과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다. 동인의 초대 당수 성암 김효원(金孝元)의 사위이다. 강원도 출신.

title: 조선 광해군 start: 1575-6-4 end: 1641-8-7 media: mediathumbnail: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7401235556E69AC2F 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A%B4%91%ED%95%B4%EA%B5%B0 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조선, 왕, 한국 description: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전에 폐위되었기에 사후 시호는 없으며, 왕이었을 때 쓴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다.


title: 김육
start: 1580
end: 16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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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시인, 교육인, 외교관, 실학자, 성리학자, 철학자, 서인,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고집과 끈기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경세가
	
	김육(金堉, 1580년 ~ 1658년 9월)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작가이며, 효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 추진하였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썼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 관찰사에 재직 중 대동법을 제창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전후복구 사업을 시도하였고,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 등을 증보·재간행하였다.
	
	인조 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현감,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충청감사 재직 중 충청도 지역에서 시범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으며,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과 함께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 병조참판, 형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과 1645년 청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뒤 화폐의 주조·유통을 건의하여 평안도부터 추진하였고, 수레의 제조, 보급을 확산시켰으며,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을 건의하고, 《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1636년(인조 14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의 연경에 다녀왔는데,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마지막 공식 사신이었다.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화폐 이용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전사업을 건의, 민간에 주전(鑄錢)의 유통에도 성공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한국 최초의 태양력인 시헌력을 도입하여 양력 사용을 보급시키기도 했다. 1651년부터 1654년, 1655년부터 1658년까지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자(字)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고손자이다. 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 할아버지이며 김석주, 김석연의 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 증 청릉부원군 김좌명의 아버지이다. 정조의 장인 청은부원군 김시묵은 김육의 5대손이다. 조호익, 성혼, 윤두수, 윤근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김상헌의 문인이 되었다. 경기도 출신.

title: 송시열
start: 1607-12-30
end: 1689-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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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상사회를 실현한 개혁자
	
	송시열(宋時烈,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행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과 윤휴의 3년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주요 이론가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1756년(영조 32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년(정조 11년) 조선 정조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회 이상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조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다.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이창,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title: 이중환
start: 1690-12-15
end: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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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정치인, 실학자, 지리학자, 성리학자, 철학자,풍수지리학자, 사상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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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곡 있는 삶, 시대를 앞선 사유
	
	이중환(李重煥, 1690년 12월 15일 ~ 175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사상가, 철학자이다.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이다.
	
	음서로 출사하여 통덕랑으로 재직 중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假注書)가 되고 그 해 승문원 부정자, 승문원 정자를 역임하였다. 이후 부사정 등을 거쳐 1716년 목호룡 등과 함께 숙빈 최씨의 묘지를 선정하러 전국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1717년(숙종 43년) 김천도찰방, 1719년 승정원 주서, 1720년(경종 즉위년) 춘추관사관, 성균관 전적, 1722년(경종 2) 병조정랑, 성균관전적, 1723년 병조정랑, 부사과를 역임했다.
	
	그러나 경종 때 목호룡이 노론 4대신이 경종을 폐출하려 한다고 고변한 신임옥사 이후 소론계로부터는 노론에게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공격당했고, 영조 즉위 후에는 노론으로부터 신임옥사 당시 그가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 준 것을 문제삼아 공격당했다. 목호룡 고변 관련자들을 국문할 때 함께 체포되어 구금, 국문당한 뒤 파면되었다. 이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전국을 다니면서 지리·사회·경제를 오래 연구하여 《택리지》를 저술하였다. 1753년 통정대부에 임명되었으나 요직에 중용되지는 못하였다. 1701년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이진휴의 아들이다. 성호 이익의 문인이자 그의 재종손이었다. 당색으로는 남인이었다.

title: 조선 영조
start: 1694-10-31
end: 1776-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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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왕, 군주,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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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성리학의 의리론을 주도한 군사(君師)
	
	영조(英祖, 1694년 10월 31일 (음력 9월 13일) ~ 1776년 4월 22일 (음력 3월 5일))는 조선의 제21대 임금(재위,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이다. 성은 이(李),  휘는 금(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원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며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다. 이후 고종 때 묘호를 높여 영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하여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 되었다.
	
	숙종(肅宗)의 서장자(차남)이며, 경종의 배다른 아우이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소생으로, 정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숙종 생존 시부터 잠재적인 계승권자였으며, 경종 때 왕세제로 책봉된다. 그러나 신임사화 등으로 위기를 넘기다가 경종의 급서로 즉위한다.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 악형 폐지, 서적 간행 등을 추진하였으나, 탕평론은 실패했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사형시키게 된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724년부터 1749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749년부터 1762년까지 아들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고 1762년부터 1775년까지 다시 친정 체제를 펼쳤으며 1775년부터 1776년 붕어할 때까지 손자 정조가 왕세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title: 신경준
start: 1712
end: 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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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실학자, 지리학자, 언어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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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과 실용을 중시한 국학자
	
	신경준(申景濬, 1712년~1781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로서,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庵),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title: 서명응
start: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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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조선, 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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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조대 학문 정책의 실무책임자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군수, 호는 보만재, 본관은 달성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에 대사헌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수군절도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역학에 통달했으며 실학 연구에 전력한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영조의 명으로 악보를 수집하여 《대악후보》를 간행했으며 글씨에도 능했다. 저서로 《보만재집》, 《계몽도설》 등이 있다.

title: 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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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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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정치인, 유학자, 철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영조·정조 연간 실시된 탕평정국의 큰 기둥을 받친 남인 관료 정치가
	
	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영조 후반과 정조대의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강박과 오광운의 문인이며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자 세자궁의 측근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영조조와 정조조의 남인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측근이자 스승이었으며 세자의 사후에는 세손의 측근이었다. 정조 즉위 후 남인의 영수로 중용되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제도의 개선과 개정에 관심을 가졌고, 1781년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였으며, 가톨릭교에 대하여 온건 정책을 폈다. 1790년에는 영의정직의 공석으로 단독으로 국정을 보좌하기도 했다. 충청남도 출신.

title: 홍양호
start: 1724
end: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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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소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18세기 후반의 참보수
	
	홍양호(洪良浩, 1724년 ~ 1802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이조판서와 양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title: 서호수
start: 1736
end: 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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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천문학자, 과학자, 실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천문학과 농학을 겸전한 전문가
	
	서호수(徐浩修, 1736년 ∼1799년)는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이자 실학자이다. 본관은 대구, 호는 학산(鶴山)이다.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의 아버지이며, 서명응의 아들이다. 정조의 신임을 받아 임종할 때까지 왕의 측근으로 활약하였고 규장각의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title: 조선 정조
start: 1752-10-28
end: 18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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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조선_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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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왕, 군주,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룩한 학자 군주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음력 9월 22일) ~ 1800년 8월 18일 (음력 6월 28일))는 조선의 제22대 왕이며 대한제국추존황제이다. 성과 휘는 이산(李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하였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을 등용,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벽파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노론이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노론, 특히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기간 중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음으로써 세도 정치의 씨를 뿌렸다. 박지원 등의 진보적 문장에 반대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켰고, 서인의 성리학자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를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능은 수원(水原)의 건릉(健陵)이다.

title: 이서구 (1754년)
start: 1754
end: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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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비운의 사림청론 정치가
	
	이서구(李書九, 1754년∼1825년)는 조선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낙서, 호는 척재,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대왕의 열두째아들인 인흥군(仁興君)의 후손으로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지평·경상우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1795년 정조 때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죄로 영해부에 유배되었다가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교정당상이 되어 왕명으로 <장릉지>를 편찬했으며, 1800년 순조 때 호조판서로 지실록사가 되어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대사헌·대호군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판중추 부사로 재직중 죽었다. 명문장가로서 특히 시명이 높아 박제가·이덕무·유득공과 함께 한시의 4대가로 알려졌으며 5언 고시에 능했다. 저서로 <서산집> <장재집> <여지고> 등이 있다.

title: 유신환
start: 1801
end: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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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유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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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산림(山林)을 벗어나고자 했던 산림학자
	
	유신환(兪莘煥, 1801년 ~1859년)은 조선 말기의 학자이다. 자는 경형, 호는 봉서, 본관은 기계이다. 
	
	헌종 때 전의현감이 되어 선비들에게 소학을 가르치는 한편, 탐관오리를 처벌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홍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부터는 후진 양성을 위해서만 힘썼다. 그는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유명하다. 저서로 《패동수언》, 《동유연원》 등이 있다. 

title: 박규수
start: 1807-10-27
end: 187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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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정치인, 유학자, 실학자, 철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개화사상의 아버지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 군인, 외교관, 개화사상가, 철학자이며 화가, 지도 제작자로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로 승화시켜준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정계은퇴 후에도 김옥균,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다.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崔益鉉),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하였다. 
	
	1848년(헌종 14년) 증광시에 합격하여 출사했다. 그는 당시 여당 노론 내에서도 비주류인 북학파였지만 1862년(철종 13년) 진주민란을 진압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잇따른 난을 평정한 공으로 크게 승진하였다.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제학을 거쳐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의 하나인 대제학에 올랐고, 이후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지냈다. 1876년 수원부 유수로 재직 중 죽었다.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초명은 규학(珪鶴), 자는 환경(桓卿) 또는 환경(瓛卿), 정경(鼎卿)이라 했고, 호는 환재(瓛齋) 또는 환재(桓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을 썼다. 이정리, 이정관, 류화, 김정희의 문인이며 시호는 문익공(文翼公)이다.

title: 명성황후
start: 1851-11-17
end: 189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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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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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왕비,대한제국, 황족, 정치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수구본당인가, 개화의 선각자인가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추존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이다. 경기도 여주시 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녀는 급진개화파에게 고용된 일본인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title: 유길준
start: 1856-11-21
end: 191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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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EC%9C%A0%EA%B8%B8%EC%A4%80
mediacredit: Wikipedia
groups: 갑신정변,조선, 문신, 정치인, 성리학자,개화파,문신, 개화 사상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갑오개혁의 이론가로 개혁을 주도한 최초의 일본 및 미국 유학생
	
	유길준(兪吉濬, 1856년 양력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 1914년 양력 9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이며 대한제국의 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성무(聖武) 또는 성무(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이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1870년(고종 7년) 박규수, 강위, 유대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박규수 사후에는 유대치와 강위, 오경석에게서 수학하였다. 1871년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번번히 대과에 낙방하고,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되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왔으며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직후 귀국하여 6년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나 김홍집 내각의 내무부협판과 내무부대신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당시 단발령을 전격 추진하였으며, 양력 사용, 신식 학교 건설 등의 개혁정책을 수립했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1900년(광무 3년)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외교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1905년(광무 8년) 11월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조선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다. 이후 계산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 계몽 등의 활동을 하였다. 국내 산업 자본의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흥사단의 조직과 1909년의 한성부민회와 청년학우회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의 한일합방 역시 반대하였으며, 한일 합방 무효 시위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총독부의 회유와 일본 정부가 준 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각종 저서와 계몽 강연을 통해 서구의 의학, 교육 등 신문명의 존재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사후 안창호에 의해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근대 최초의 한글 문법서이자 국어사전인 조선문전을 발간하였고, 10년간의 수정과 증보 후 1909년(융희 3년)에는 대한문전으로 재간행하였다. 또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소개한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와 이탈리아의 통일을 소개한 《이태리 독립전사》등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후배였던 윤치호에 의해 그 자신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출신 주요 공모, 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 노론 실학파 학자 박규수(朴珪壽), 개화 사상가 유대치, 오경석(吳慶錫), 강위(姜瑋) 등의 문하생이었다. 한성 출신.

title: 남궁억
start: 1863-12-27
end: 19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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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사상가,대한제국, 계몽운동가, 언론인, 독립운동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와 겨레 사랑을 실천한 민족주의자
	
	남궁억(南宮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은 대한제국 조선 왕조 말기의 교육자, 계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 사회운동가, 시인, 작사가, 작곡가, 언론인이다.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號)는 한서(翰西)이며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원적지는 강원도 홍천이며 한성부 출생인 그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노래들을 작곡하였으며 좌옹 윤치호의 사돈이기도 하다.
	
	1887년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종의 통역관이 되어 관직에 나갔으며 1894년 내무부 토목국장이 되어 경성부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아 완공시켰다. 또한 경성부내의 도로 정비와 도시 계획을 주도하였다. 그뒤 개화, 계몽운동을 추진하다가 1903년부터 성주목사, 양양군수(襄陽郡守)를 지냈으나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대한협회장,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계몽,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1910년 10월 한일합방 이후에는 배화학당 교사와 상동학원 원장을 겸하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으며, 신편언문체법(1914), 가정교육(1914) 등의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1918년 고향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여 교회와 학교를 짓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추진했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석방되었다. 성이 남(南)이고, 이름이 궁억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성이 남궁이고 이름이 억이다.

title: 서재필
start: 1864-1-7
end: 19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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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갑신정변,조선, 문신, 대한제국, 정치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개혁 정신의 실천과 기독교 신앙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또는 미국 귀화명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Philip Jason)은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언론인, 군의관, 정치인, 의학자였다. 미국에서 해부학자, 의사로 활동했다. 본관은 대구이다.
	
	1882년(고종 20년) 과거에 급제,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 망명 생활을 했다. 1895년 귀국하여 독립 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參政權)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는데, 후일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의 개화 계몽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 체류, 대학을 다니며 의사로 활약했다. 이후 문구점과 상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이승만, 박용만, 안창호 등과 함께 재미한국인 교민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전후,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하면서 생계에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병원에 의사로 취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여 1945년 1월 미 의회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과도정부의 고문역을 역임하다가 1948년 출국 후 미국에서 병사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였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라 하여 그의 두 형과 부모는 자결했고, 옥에 갇힌 그의 본처 역시 자결했다. 당시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 역시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맏형 서재춘의 아들 중 살아남은 조카들과 동생 서재창의 유복자, 서재우의 아들 등이 혈통을 이어 그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시집간 큰누나와 누군가에 의해 구출된 여동생 서기석 등은 겨우 살아남았다.
	
	본관은 대구이고, 자(字)는 윤경(允卿), 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며, 영문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일명 “피제손” 이는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음역한 것이다. 또는 또는 제이슨(Philip Jason)이라고도 자칭했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堤仙) 또는 피제선(皮堤仙)으로 음역하였다. 필명은 오시아(N. H. Osia) 전라도 보성군에서 태어났지만,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에 있었고 논산과 대전에서 성장했으므로 충남 출신으로도 간주된다. 김성근(金聲根),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다.

title: 이승만
start: 1875-3-26
end: 1965-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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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정치인,대한제국,대한제국,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반공 건국과 분단 독재의 카리스마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스위스 등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발췌개헌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채 헌법을 두 차례 개정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58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으로 대표되는 언론탄압을 자행하였고,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통해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4·19 혁명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title: 김구
start: 1876-8-29
end: 1949-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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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정치인,대한제국, 승려, 독립유공자,백색 테러,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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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교육자 겸 종교인,독립운동가 겸 통일운동가, 정치인이었다. 몰락 양반가의 자손 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승려로 활동했으며 이후 기독교에 귀의하였다.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한 개신교 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정부 내 노선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정치 자금을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나눠주던 김립을 암살했고, 자신의 부하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안공근의 암살 배후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해방 후에도 존 하지, 브루스 커밍스 등에 의해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송진우 암살 직후 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 때는 현장에서 한국독립당원이 검거되면서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을 받기도 했다. 또한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title: 한상룡
start: 1880-10-16
end: 194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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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민족을 비월(飛越)한 사이비 근대인
	
	한상룡(韓相龍, 1880년 10월 16일 ~ 1947년 10월 30일)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 겸 금융인, 기업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와 고문을 지냈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title: 신채호
start: 1880-12-8
end: 193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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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학자, 역사가, 독립운동가,일제 강점기, 역사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절대적 자유를 꿈꾼 영원한 혁명가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사학자이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견해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title: 김규식
start: 1881-01-29
end: 195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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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건국훈장,대한제국, 교육인, 혁명가, 종교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김규식과 항일통일전선·좌우합작운동
	
	김규식(金奎植, 1881년 양력 2월 28일(음력 1월 27일)~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년간 외교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파리강화회의 참가 중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였고, 파리회담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하였으나 좌절당하였다. 1919년 3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로부터 전권대사와 외무부서장에 임명되었다. 4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파리대표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만주에서 대한독립군단의 지휘관으로도 활약하였고,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0년 다시 임시정부에 재입각,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당 주석직에 올랐으며,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광복 후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 에 나섰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견해를 수정,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3상결정 부분 지지와 미소공위, 좌우합작 당시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2월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金九),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나 48년 5월 귀환 후, 불반대 불참가로 입장을 바꾸고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초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총장, 파리위원장, 8월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1920년 학무총장, 1930년 8월 학무장, 11월 국무위원, 1932년 11월 국무위원 등을 지내고 1940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었다. 대중정치나 선동정치를 경멸하였고 정당활동을 기피하였으며, 정당활동으로는 민족혁명당 주석, 민중동맹 위원장,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등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가명은 '김성'(金成) · '김중문'(金仲文) · '김일민'(金一民) · '여일민'(余一民) · '왕개석'(王介石) 등이며, 별칭으로는 '변갑'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노론 중신인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의 방계 후손이었다.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이나 부친이 관리로 집무하던 중 태어난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이다.

title: 여운형
start: 1886-5-25
end: 1947-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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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대한제국, 교육인,대한민국 임시 정부,일제 강점기, 목회자, 정치인, 언론인, 독립운동가
description: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安昌浩)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외교관으로는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했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노병회, 시사책진회, 중한호조사 결성에도 참여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으나 임정을 떠났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초중반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과 타스 통신사 직원으로 지냈으며, 국내에서는 1933년~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체육인으로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과 미군정기 군정청 체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했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십여 차례 당했으며, 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사후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여운홍의 친형이고, 철학자 박찬기의 외삼촌이다. 경기도 양근군(현재의 양평군) 출신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

title: 홍명희
start: 1888-5-23
end: 196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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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립운동가,조선,대한제국, 독립운동가, 소설가, 작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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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적이며 민족적이고자 했던‘중간 길’지식인의 문학과 정치적 선택
	
	홍명희(洪命熹,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부총리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9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산.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title: 안재홍
start: 1891-12-30
end: 196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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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운동과 신민족주의의 이론가
	
	안재홍(安在鴻, 1891년 12월 30일 ~ 1965년 3월 1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이며 언론인, 역사가이다. 일제치하에는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활동 주역이었으며, 조선어학회, 흥업구락부 등에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사회단체와 독립운동 외에도 사학자로서 고적지 답사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해방정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한성일보사 사장 등을 맡았으며, 1946년에는 우사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47년 2월 5일 미군정청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어 1948년 8월 15일까지 근무했다. 남북협상에는 소극적이었으나 남북협상 실패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인정, 대한민국 국기시정위원회 위원 등으로 참여했다. 1950년 5월의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나, 6월 25일 한국전쟁 때 조선 인민군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되었다. 아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진위군 출신.
	
	해방 후에는 중도우파의 지도급 정치가로서 자신이 정립한 신민족주의론과 신민주주의론에 입각하여 우파를 중심으로 좌파까지 망라하자는 이른바 민공협동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미소간 냉전체제가 고착되어가는 국제정세 하에서 중도파들의 민공협동론은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편이었다. 이에 안재홍은 이승만과 유엔과 미국이 제안, 지지하는 남한 단정수립론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변신하였다는 평이 있다.

title: 김백선
start: 1895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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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의병장,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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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왕후 지지, 개화파 반대 활동을 했던 평민 의병장
	
	김백선(金百先, ? ~ 1895년)은 구한말의 의병장이었다. 별명 백선(伯善). 경기도 양평군 출생. 
	
	이명은 백선(百先). 경주 김(金)씨 십천공파 집안 출신으로 기개와 용력이 비상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지평(砥平)에서 일어나자 동향 사람이던 맹영재(孟英在)와 함께 포수대를 조직, 이를 토벌하였다. 맹영재는 그 공으로 지평군수가 되었고 김백선은 절충장군(折忠將軍)이 내려졌다.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항일 기운이 고조되자, 맹영재를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 때 마침 제천에서 이필희(李弼熙)·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1896년 1월 휘하 포군 4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함으로써 제천의병에 실질적인 전투력을 제공하였다.
	
	이어 같은 달 28일 유인석(柳麟錫)이 제천의병의 지휘를 맡아 부대의 편제를 정할 때 선봉장에 임명되어, 충주성전투 등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3월 27일 가흥(可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 진지를 점령하던 중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끝내 패퇴하게 되자, 원군을 보내지 않은 중군장 안승우에게 거세게 항의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군기를 문란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휘하 의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진을 동요시켜, 제천의병의 급격한 쇠퇴를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 내부에서 종종 발생하던 양반 유생과 평민 ·천민 간의 상하 신분 갈등 사건으로 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후손들은 김백선이 양반 출신이라는 점에서 상민으로 천시된 사건으로 보고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갈운리에 있다.

title: 김진구
start: 189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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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일제 강점기,학자, 연극인,야담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김옥균 숭배자의 혼미와 허망
	
	김진구(金振九, 1896년 12월 23일 ~ ?)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한국의 야담가다.

title: 윤보선
start: 1897-8-26
end: 19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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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대한제국,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대통령,일제 강점기,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꺾이지 않는, 그러나 시류에 흔들린 야당의 지도자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제4대 대통령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3일까지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부에서 대통령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 사퇴성명을 번복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과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친일파인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이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칭타칭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title: 우장춘
start: 1898-4-8
end: 1959-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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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대한제국,일제 강점기, 생물학자,농학자, 식물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국적(國賊)의 아들'에서 '흥농(興農)의 아버지'가 된 세계적인 육종학자(育種學者)
	
	우장춘(禹長春, 1898년 4월 8일 ~ 1959년 8월 10일)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한국의 원예육종학자이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아버지의 오류가 한평생 짐이 되었으나 한국의 식물학과 농학을 이끌었다. 부산광역시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우장춘 기념관)이 있다.

title: 손진태
start: 1900-12-28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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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일제 강점기, 역사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민속학자에서 역사학자로
	
	손진태(孫晉泰, 1900년 12월 28일 - ?)는 일제 강점기의 사학자, 민속학자로, 호는 남창(南滄)이다. 본관은 밀양, 경상남도 동래군 (현재의 부산광역시) 출신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를 신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연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27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1930년부터 1934년까지 동양문고 사서로 근무했다. 그 후 1932년에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였으며 1933년에 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했다. 1934년에는 진단학회의 발기인 가운데 하나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에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1937년에는 보성전문학교 초대 도서관 관장을 맡았다.
	
	광복 이후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194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1950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그는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에 납북되었으며 주요 저서로는 《조선 민족문화의 연구》, 《조선 민족사 개론》 등이 있다.

title: 김일성
start: 1912-4-15
end: 19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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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한국, 독립운동가, 군인,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파시스트, 정치인
description: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 지도자다. 본관은 전주. 1948년 9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12월 15일부터 1994년 7월 8일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때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북조선로동당의 소비에트 연방 대리자로 활동하였고, 남북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건 뒤 그해 4월 제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김구, 김규식 등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기망했고, 그해 6월 제2차 회의를 해주에서 개최하였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그해 9월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0년 소련의 스탈린을 설득해 그의 승인으로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국군과 UN군에게 패배하여 현재와 같이 남과 북으로 한반도를 나누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후 노동력 총동원(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파 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으며, 1972년에는 사회주의헌법을 제정,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1960년 이후 김일성은 주체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했다.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이 세습했다. 1994년 그가 사망하고, 1998년에 개정된 김일성헌법에서 정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김일성을 호칭할 때에는 그 이름앞에 최상의 수식어, 최상의 경어가 붙는다. 북한에서 김일성을 '어버이 수령님', '아버지 장군님'으로  호칭한다. 영국 인명사전에서 세계 10대 독재자로 선정 되었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였으나, 항일 무장 투쟁을 하면서 김일성으로 개명 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나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김일성 가짜설' 이 지속 제기되고 있어 김일성 실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검증이 필요한 사항이다
	한편 한국 전쟁 전쟁 범죄, 한국 전쟁 장본인 의혹,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개신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title: 김환기
start: 1913-2-27
end: 197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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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일제 강점기, 화가,대한민국,서양화가, 대학 교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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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환기(金煥基, 1913년 2월 27일 ~ 1974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수화(樹話)이고,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생이다.
	
	1936년 일본 니혼 대학교 미술학부를 마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에 출품했다.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 1954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엠베지트 화랑을 위시하여 1957년 파리·니스·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초대 예술원 회원·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브라질로 갔고, 동 국제전의 명예상을 받았으며, 그곳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1964년 이후 부인인 수필가 김향안(金鄕岸)과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 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전후 14회의 개인전을 국내외에서 가졌고,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韓國美術大賞展)에서 대상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출발하여 동양적인 관조(觀照)와 아취(雅趣)를 근간으로 한 반추상(半抽象)의 세계를 보이다가 도미(渡美) 후에는 완전히 추상화풍으로 전환하여 옵티컬한 양식의 새로운 사조(思潮)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인다. 작품으로 〈산〉, 〈산월(山月)〉, 〈야상곡(夜想曲)〉,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다.

title: 박정희
start: 1917-11-14
end: 197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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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관동군,일제 강점기, 교사,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육군사관학교 동문,육군대학교 동문,대한민국, 군인, 장군, 정치인, 대통령,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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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1960·70년대를 독점한 인물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이며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육사를 57기로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일본 육사 출신 백선엽의 구명과 여순사건과 관련한 남로당 조직에 대하여 자백함으로써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이후 강제 예편된 박정희는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 등 민주화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으로 극명하게 나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평가,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아울러 의료보험제도 도입과 그린벨트 규제, 조림 사업, 산림복원사업 등을 추진했다. 반대 측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이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으로 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베트남 월남전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또한 박정희는 핵 개발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며,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title: 장준하
start: 1918-8-27
end: 197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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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일제 강점기, 교육인, 군인, 광복군, 정치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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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과 저항의 생애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 ~ 1975년 8월 17일, 본관은 安東)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 쓰가다 부대에 자원 입대하였고,1944년 1월에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됐으나, 그해 7월 장쑤 성 쑤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군 중앙군 준위가 되었다. 1945년 쓰촨 성의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 광복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45년 11월 임정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공무원에 채용되어 서기관으로 임용되었고,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사상계》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장면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2013년 1월 24일에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title: 김수영
start: 1921-11-27
end: 196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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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대한민국, 시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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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title: 김대중
start: 1924-1-6
end: 2009-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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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국민의 정부, 기업인, 대한민국, 정치인, 대통령, 한국
description: 
	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2000년 임기 중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고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국내외에서 오랫동안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했다.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 대내외적으로는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연설에 능하였으며,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로 비유되어 불렸다.

title: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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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200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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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대한민국, 판사, 변호사, 대통령, 해양수산부 장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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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았다.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직 권한이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항상 상회했으며 임기 내내 부동산 시장과 증시가 활황을 보였는데, 이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2.9%와 박근혜 정부의 2.8%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비슷한 처지의 싱가포르와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6.6%와 4.6%로 세계 경제가 호황을 누릴 때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부동산 투기 근절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IMF 사태 이후 악화된 소득분배가 노무현 정권에서도 그다지 개선되지 못했다는 점은 민심이반을 초래했고 이명박 정권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으로의 교체 원인이 되었다.
	
	주요 업적으로는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보수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재벌 총수들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 재벌개혁 중 하나인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 시행, 재벌기업들 사이의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도 강화한 것 등이다. 대통령이 자기 진영의 불법대선자금을 앞장서 밝힘으로써 정경유착을 상당히 완화한 것도 높게 평가받았다.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들이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고,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사후 1주일 동안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title: 김광석 start: 1964-1-22 end: 1996-1-6 media: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650284A556E627B24 mediathumbnail: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411DF4A556E627A04 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A%B4%91%EC%84%9D mediacredit: Wikipedia groups: 대한민국, 가수, 싱어송라이터, 한국 description: 김광석 (金光石, 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찾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이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6년 1월 6일 자살로 일생을 마쳤다. 대표곡으로는 〈사랑했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 〈그날들〉, 〈이등병의 편지〉,〈먼지가 되어〉 등이 있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08년 1월 6일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노래비는 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 세워졌으며 조각가 안규철이 제작했다 또한 2010년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행정명:김광석다시그리기길)가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시인 정훈교의 시(詩) 를 비롯한 다양한 벽화와 작품 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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