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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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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표 > 역사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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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연대표 - 데이터(세계)

연대표 보기 : http://sseeookk.tistory.com/entry/역사인물-연대표


title: 호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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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시인,  작가, 음유 시인,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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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메로스,(盲人, 오미로스, 기원전 8세기 경)는 고대 그리스의 유랑시인이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와 수편의 시인의 작가이며 맹인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정확한 생몰 년대는 미상이다. 영어식 이름인 호머(Homer)로도 알려져 있다.

title: 	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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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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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釋迦牟尼 · Śākyamuni, 기원전 624?~544?[1])는 불교의 교조이다. 석가는 부족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 석존 · 불 · 여래 등의 10가지 존칭과 아명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라고 칭한다.
	
	샤카족의 중심지인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하거나 고행을 하였으나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가 긴요함을 알았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선정을 수행하여 35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붓다, 佛陀)가 되었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을 편력하며 교화에 힘썼고 쿠시나가라에서 80세로 입멸하였다.

title: 피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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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수학자, 철학자, 기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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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타고라스(Πυθαγόρας, 기원전 580년 경 - 기원전 490년 경)는 이오니아의 그리스 철학자이자, 피타고라스 학파라 불린 종교 단체의 교주이다. 피타고라스에 관해 알려진 정보가 대부분 그가 죽고 수세기 후에 쓰여진 것이라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매우 드물다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아마 이집트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학식을 닦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530년 즈음, 피타고라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토네로 이동하여 종교적인 학파를 세웠다.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은 피타고라스가 개발한 종교적 의식과 훈련을 수행하고 그의 철학 이론을 공부했다. 학파는 크로톤의 정치에도 적극 간섭했는데, 이가 결국 그 자신들이 몰락을 불러왔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만나던 건물은 방화당했고 피타고라스는 도시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말년을 메타폰툼에서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 말 피타고라스는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종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위대한 수학자나 신비주의자, 과학자로서 흔히 추앙받으며, 특히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정리인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뿐 아니라 그에 관한 전설과 혼란으로 그의 실제 공적이 흐려져서, 누가 그의 가르침에 관해 자신있게 답을 주기가 힘들고, 일부는 그가 수학과 자연철학에 기여를 남겼다는 사실에까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피타고라스에게 돌려진 많은 공적은 어쩌면 사실 그 동료나 제자의 공적이었을 것이다. 또 그의 제자들이 모든 것은 수이며 수야말로 궁극적인 본질이라는 사실을 믿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피타고라스는 최초로 스스로를 철학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 사람이라고 한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플라톤과, 그를 통해 서양 철학 전체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title: 페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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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정치가, 웅변가, 장군, 군인
description: 
	페리클레스(Περικλῆς, 기원전 495년경 ~ 429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웅변가, 장군으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이에 아테나이의 황금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의 모계는 역사상 영향력있었던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출신이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쳐, 당대 역사가 투퀴디데스는 그를 이르러 "아테네의 제1시민"이라고 칭하였다. 그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아테네 제국을 세우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개전 후 2년 동안 아테네를 이끌었다. 그가 아테네를 지도하던 시기인 기원전 461년경에서 561년경 사이는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하기도 하며, 때로는 이 시기를 더 이전인 페르시아 전쟁까지 잡거나, 다음 세기 이후까지 잡기도 한다.
	
	페리클레스는 예술과 문학을 장려하였는데, 덕분에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건축물을 짓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이 건물은 아직까지 대부분 현존하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건축 계획은 도시를 꾸미고, 아테네의 영광을 드러내었으며, 인민에게 일거리를 제공하였다. 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정을 육성하였으며, 비판자들은 그를 이르러 대중 영합 정치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title: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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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그리스, 교육자, 정치인, 철학자
description: 
	소크라테스(소크라티스,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와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원전 399년에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흔히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불린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title: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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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철학자
description: 
	플라톤(Greek: Πλάτων, ''Plátōn'', "넓은, 어깨 폭이 넓은"; 기원전 428/427 또는 424/423  – 기원전 348/347)은 서양의 다양한 학문에 영향력을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고, 현대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아카데메이아(academia)를 아테네에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그의 실제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 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들에 대해 저술하였다. 플라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대화편이다. 비록 일부 편지들은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에 의한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스 I'과 '클레이토폰'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의심스럽거나 또는 '데모도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I'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대개는 위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편지들은 대개 거의 모두 위조된 것으로 여겨지며, 일곱번째 편지만이 예외로서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내용과 주장 중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견해인지에 대한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것도 글로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 이라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플라톤의 많은 아이디어들,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들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것을 빌려오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다.

title: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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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우주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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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84년 ~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 윤리학, 도덕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동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에 대한 형식 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 되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1400년 까지의 중세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특히 가톨릭 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편의 품위있는 논문과 대화록을 저술했음에도(키케로는 그의 문체를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고 묘사하였다.) 오늘날 그가 쓴 글의 대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쓴 글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다.

title: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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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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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 감마 호 메가스, 알렉산데르 테르티우스 마그누스, 알 이스칸다르 알 탈리트 알 아크바르 기원전 356년 7월 말 ~ 기원전 323년 6월 10일)는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돈의 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이다. 그리스 폴리스 제국(諸國)과 오리엔트 지방에 대한 공격적 팽창으로 패권을 잡아 마케돈의 바실레우스(군왕), 코린토스 동맹의 헤게몬(패자),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임하고 스스로를 퀴리오스 티스 아시아스(아시아의 주主)라고 칭하였다.
	
	기원전 356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20세의 나이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바실레우스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치세 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미증유의 군사 정복 활동으로 보냈고, 30세가 되었을 때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그 이전까지 고대 서양에 전례가 없던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전투에서 져 본적이 없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유년기의 알렉산드로스는 16세가 될 때까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기원전 336년 부왕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개척한 부강한 왕국과 숙련된 군대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에 이어 코린토스 동맹의 패자로 추대된 알렉산드로스는 그 권위를 이용해 팽창 정책을 시작했다. 기원전 334년 그는 소아시아에서 군림하던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10년에 걸친 원정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 등 몇 차례의 결정적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분쇄했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페르시아 제1제국을 멸망시켰다.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돈 제국의 강역은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렀다.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인도를 침공했으나 병사들의 반발로 회군하였다.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삼기 위한 개발을 계속하던 와중이었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는 계획했던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시작하지 못한 채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그가 죽자마자 일련의 내전으로 산산이 조각났고, 조각난 각각의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들과 참모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각각 왕을 칭하고 할거하였다. 이들을 디아도코이라 한다.

title: 아르키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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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기하학자,철학자, 공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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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키메데스(Ἀρχιμήδης, 아르히미디스, 약 기원전 287년 ~ 기원전 212년)는 고대 그리스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일부였던 시라쿠사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겸 공학자이다. 그의 생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얼마 되지 않으나 고전 고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물리학 분야에서 정역학과 유체정역학을 연구했으며 지레의 원리를 설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아르키메데스 나선양수기, 해상에 있는 배를 공격하기 위한 거울 등의 기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고전 고대 시기의 가장 뛰어난 수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학과 관련한 아르키메데스의 업적으로는 실진법의 도입, 포물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의 넓이 계산, 원주율의 계산과 같은 것들이 있다.

title: 아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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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인도, 불교도,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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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소카는 인도 마가다 국 제3왕조인 마우리아 제국의 세 번째 임금으로 인도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왕이다(재위: 기원전 265년경 ~ 기원전 238년 혹은 기원전 273년경 ~ 기원전 232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야의 손자이며,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의 하나이자 황제 중의 황제인 전륜성왕(samrāṭ Chakravartin)으로 인용된다. 아소카는 수많은 군사 정복뒤에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아소카의 제국은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서쪽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동쪽으로는 인도의 아삼 주 남쪽으로는 미소레 주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느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곳곳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정리하였으며, 실론·타이·버마에까지 불교를 전파하기에 노력하였다. 총애하는 왕비를 잃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죽었으며,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 

title: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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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역사가, 시인, 내시, 작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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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 천(스마첸,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은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이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물려받아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이릉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릉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진 사건에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을 받게 된 것이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히어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실제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를 사가가 해석한 글로 존중받는다.

title: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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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로마, 정치인, 집정관, 철학자
description: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1월 3일 - 기원전 43년 12월 7일)는 로마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이다.

title: 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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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로마, 군인, 정치인, 장군
description: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7월 12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 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52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급기야 자신을 종신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 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 플루타르코스, 카시우스 디오, 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title: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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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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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기원전 약 7~2년 ~ 기원후 약 26~36년 또는 기원후 4년) 또는 나사렛의 예수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몸인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에 따라 예수를 동정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강생한 하느님(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느님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칼케돈 공의회)하기도 한다. 흔히 메시아라는 뜻의 존칭인 그리스도를 붙여 예수 그리스도라 부른다. 
	
	기독교 중 일부 교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 하느님(하나님)이 아닌, 하느님(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하느님(하나님)의 아들로서 신격을 가졌지만 하느님(하나님)과는 서로 다른 존재로 여기기도 하는 등 논란은 있다. 예수의 생애와 행적은 사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랍비 중 한 사람으로 여기며,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무함마드에 앞선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여긴다.

title: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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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수학자, 철학자,이집트, 천문학자
description: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Κλαύδιος Πτολεμαῖος, AD 83년경 ~ 168년경)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점성학자이다. 고대 이집트의 테바이드에서 태어났을 것이라 추정되며, AD 168년쯤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다. 
	
	이름 중 클라우디오스(Claudius)는 고대 로마의 둘째 이름으로 족명(族名)을 나타내며 이것은 그가 로마 시민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첫째 이름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당시 시민들의 일반적인 첫째 이름이 티베리우스(Tiberius)인 걸 감안하면 그의 첫째 이름도 티베리우스(Tiberius)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는 그리스식 이름이며 이집트의 왕가의 이름이었지만 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인척 관계라고는 여겨지지 않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사회 일원이라는 것 외에 삶의 세밀한 부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어로 책을 썼고 바빌론 천문학 데이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이러한 그의 저서들은 후의 이슬람과 유럽 과학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코페르니쿠스 이전시대 최고의 천문학서로 인정받고 있는 《천문학 집대성》(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있는데 이것의 아랍어 역본인 《알마게스트》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또한 지리학분야의 《지리학》(Geography, Geographike Hyphegesis)이 학계에서 오래도록 아낌을 받았고, 점성술책인 《테트라비블로스》(四元의 數, Tetrabiblos)도 아랍세계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밖에도 광학과 음악에 관한 여러 저서가 있다.

title: 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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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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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틸라(Attila, 아틀리끔찍한 자, 에첼, 406년 ~ 453년)는 훈족 최후의 왕이며 유럽 훈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title: 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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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슬람교, 군주,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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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함마드مُحَمَّد Ar-muhammad.ogg, 570년경~632년 6월 8일}는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성사(聖使)이다. 흔히 마호메트 또는 모하메드(Mohammed, Muhammad, Mahomet)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함마드를 영어로 쓴 것을 번역한 표현이다.

title: 카롤루스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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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신성 로마 제국,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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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롤루스 대제(740년, 742년 또는 747년 ~ 814년 1월 28일, 카롤루스 마그누스, 카를 데어 그로세, 샬리메인, 샤를마뉴, 카를로마뇨)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서부, 중부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확장했다. 재임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800년 12월 교황 레오 3세에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반대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카롤루스 대제의 국내외적인 업적은 서유럽과 중세시대를 정의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신성 로마 제국 등의 재임연표에서는 샤를 1세 또는 카를 1세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피핀의 뒤를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국을 위협하던 사라센과 전쟁을 일으키던 중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언급되었던 론세스바예스 전투(779년)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기도 하였으나 교황의 보호자가 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아갔다. 또한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굴복시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 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 출발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스, 독일 군주의 시초 인물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이후 최초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 시켰으며 또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사후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대제'로 번역되는 마그누스(라틴어) 또는 마뉴(프랑스어)의 칭호를 얻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카롤루스 대제 또는 샤를(라틴어 이름 카롤루스의 프랑스어 발음)마뉴라고 불린다. 또한,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라고 부른다.

title: 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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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몽골, 군인, 군주, 중국
description: 
	칭기즈 칸(Činggis Qaγan, 성길사한, 1162년 4월 16일 ~ 1227년 8월 18일)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점유한 몽골 제국의 창업자이자 초대 카간이다. 원래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진(패아지근 철목진)이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출신이 아닌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합리적 인사제도인 능력주의에 기반한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사,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중국사에는 원(元) 태조(太祖)로 기록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몽골 칭기즈 칸 국제공항으로 남아 있다.

title: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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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탈리아, 귀족, 가톨릭 성인, 철학자,스콜라 철학자, 신학자
description: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년? ~ 1274년 3월 7일)는 기독교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그는 자연 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를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title: 마르코 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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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베네치아 , 상인, 탐험가
description: 
	마르코 폴로(Marco Polo, c.1254년 9월 15일 – 1324년 1월 8-9일)는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동방견문록》을 지은 작가이다.

title: 단테 알리기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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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132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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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탈리아, 시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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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년 3월 1일경 ~ 1321년 9월 13일 또는 9월 14일)는 두란테의 약칭인 단테(Dante)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시인이다. 피렌체의 알리기에리 혹은 알라기에리(Alagh(i)eri) 가문의 일원이다(단테의 아들 야코포의 설명: “Durante olim vocatus Dante, condam Alagherii de Florentia”). 두란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은 "장수하는 날개가 달린 자"라는 뜻인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남긴 다양한 영향들의 결과를 예언한 실로 상징적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title: 조반니 보카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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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탈리아,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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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 1375년)는 이탈리아의 소설가·시인이다.

title: 홍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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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원나라, 승려, 도적, 명나라, 황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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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 태조(明太祖, 원 천력 원년 9월 18일(1328년 10월 21일) ~ 홍무 31년 윤 5월 10일(1398년 6월 24일)은 명나라(明)의 태조(재위 : 1368년 ~ 1398년)이다. 성은 주(朱), 이름은 원장(元璋), 초명은 중팔(重八), 흥종(興宗), 덕유(德裕) 자는 국서(国瑞), 묘호(廟號)는 태조이다.
	
	호주(濠州)의 한족 빈농가문에서 태어나 고아가 되었다. 그 뒤 빈한한 환경에서 자라 탁발승으로 지내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곳을 전전하다 홍건적(紅巾賊) 참여해 홍건적의 부장 곽자흥의 휘하에서 활약하다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1366년 스스로 명왕이라 칭하고 각지의 군웅들을 굴복시킨 뒤 1368년 스스로 자립해 황제에 올라 주씨명국을 건국했다. 이후 그는 한족 왕조 회복의 기치를 명분으로 하고, 지방관의 행정, 입법, 군사 권한을 분산시켜 서로 견제하게 하는 한편 중서성을 혁파하고 6부 상서들에게 직접 결제받는 등,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황권 강화를 꾀하였다.
	
	반원, 반몽골과 한족의 국가 재건을 기치로 북벌군을 일으켜 직접 지휘, 1388년 몽골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축출하고 중원을 통일했다. 왕조 성립 뒤에는 지역 토호 및 공신세력을 숙청하고 지방관 파견과 제후국 봉지 임명 등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시켰다. 또한 한족의 문화를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유교 사상에 따라 자급자족 농경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고, 대외적으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공신들의 대량숙청을 감행하는 비정상적인 공포정치를 펼쳤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다.

title: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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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발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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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추르 라덴 춤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년경 ~ 1468년 2월 3일)는 약 1440년 경에 금속 활판 인쇄술을 사용한 독일의 금(金) 세공업자이다. 본명은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Johannes Gensfleisch)이고, 구텐베르크는 통칭이다. (영미권에서는 구텐버그라고 발음한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활자 설계, 활자 대량 생산 기술을 유럽에 전파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업적은 이런 기술과 유성 잉크, 목판 인쇄기 사용을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활자 제작 재료로 합금을 사용하고, 활자 제작 방식으로 주조를 채용하였다.

title: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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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프랑스,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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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또는 성녀 요안나 아르크(Sancta Ioanna de Arc)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오를레앙의 성처녀(la Pucelle d’Orléans)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가톨릭교회에서는 모든 성인의 이름을 라틴어식으로 명명하기 때문에, 잔 다르크를 아르크의 요안나 또는 요안나 아르크라고 부른다. 따라서 세례명으로 쓸 때는 요안나라고 명명한다. 프랑스 동부 지역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부르고뉴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현상금과 맞바꾸어 잉글랜드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를 재판장에 세워 반역과 이단의 혐의를 씌운 후에 말뚝에 묶어 화형에 처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였다.
	
	그로부터 25년 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재판소는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여 그녀에게 내린 혐의는 모두 무혐의이며 따라서 무죄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순교자로 선언하였다. 잔 다르크는 1909년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잔 다르크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 루이,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등과 더불어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오늘날 잔 다르크는 서구 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특히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서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때 프로파간다에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소재로 자주 쓰였으며, 군인들은 잔 다르크의 탄생지인 동레미라퓌셀(라퓌셀은 처녀라는 뜻으로, 잔 다르크를 기려 본래의 지명 동레미에 추가되었다)을 순례하기도 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를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와 만화, 소설, 회화 등의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잔 다르크는 흔히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탄 여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title: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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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이탈리아,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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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크리스토발 콜론, 크리스토방 콜롬부, 1450년 또는 1451년 제노바 ~ 1506년 5월 20일 바야돌리드)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title: 레오나르도 다 빈치
start: 1452-4-15
end: 1519-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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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르네상스,이탈리아, 화가, 건축가, 조각가, 발명가
description: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

title: 니콜로 마키아벨리
start: 1469-5-3
end: 1527-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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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탈리아, 철학자
description: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년 5월 3일 ~ 1527년 6월 21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사상가, 정치철학자이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title: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start: 1473-2-19
end: 154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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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폴란드,  천문학자
description: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 미코와이 코페르니크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가져온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다. 여러가지 이름 표기는 그가 태어난 곳(폴란드)과 그의 모국어(독일어) 그리고 그가 즐겨 쓴 라틴어를 감안하여 세가지 언어로 표기한다. 인공원소 코페르니슘의 이름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그는 라틴어,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두 말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현재의 폴란드 중북부에 있는 당시의 한자동맹 도시인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에서 관리이자 주철업을 하는 아버지 니콜라스 코페르니크과 당시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방 출신인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 사이에서 네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 밑에서 여의고 토룬에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당시 독일의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지방의 대도시 크라카우(현 크라쿠프)로 가 대학에 입학하여 1494년까지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149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가 삼촌의 권유로 신학과에 입학한다.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코페르니쿠스는 또한 로마 및 파도바 대학에 등록하여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논의에만 몰두하던 스콜라학의 학통을 따르지 않고 천체관측과 궤도 계산을 위주로 하던 실지천문가였다.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성질에 대한 통념이 기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암흑기에서 과학혁명으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는데, 이것은 당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코페르니쿠스가 행했던 인간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객관적인 입장의 태양중심설로의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이른다.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었다.
	
	이탈리아 유학시기 접한 플라톤주의와 고대문헌 조사의 영향으로 지동설을 구상하게 된 코페르니쿠스는 레기오몬타누스가 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핵심적 문제제기가 실린 책 <요약>을 접하고 자신의 우주 모델에 대한 개략적인 생각을 더욱더 발전시켜나갔다. 그 후 1510년에 태양 중심 천문체계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했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해설서Commentariolus>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요약본 형태의 원고를 지인들에게 돌렸다.
	
	[짧은 해설서] 발표 후 코페르니쿠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1543년《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발표한다. 우주와 지구는 모두 구형이며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지구도 원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행성을 하나, 하나 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체계로 보아 행성간의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과 큰 차이점을 두었다.
	
	책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매우 미약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져 나갔다. 1616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금서목록에 추가되기도 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천문학과 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혁명적 씨앗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 많은 과학자들. 특히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title: 마르틴 루터
start: 1483-11-10
end: 154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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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신학자
description: 
	마르틴 루터, 또는 말틴 루터(Martin Luther 또는 Lud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은 그의 저서 《영웅숭배론》에서 루터에 대해 우상파괴적인 에언자이자 사람들을 진실로 되돌린 영웅이며 인간이 지닌 용기의 진정한 표본이라고 평가했다.

title: 티치아노
start: 1488 (어림)
end: 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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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탈리아,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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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90년경 ~ 1576년)는 북이탈리아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출생한 이탈리아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했던 화가이다. 
	
	그의 창작 시기는 베네치아 회화의 황금기와 맞아 떨어졌다. 그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경제적,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티치아노는 9살이 되었을 때 베네치아로 가서 젠틸레 벨리니와 조바니 벨리니 형제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1513년 그는 산 사물엘레에 자신의 작업장을 열었고, 유럽 전역에서 찬양을 받는 화가로 발전했다. 1533년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1545년 티치아노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청을 받아서 로마를 방문했다. 1548년과 1550년 티치아노는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를 따라서 제국 의회가 있는 아욱스부르크에 갔다. 상당히 고령이었던 티치아노가 1576년 페스트로 죽었을 때 그는, 베네치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화가였다.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별 가운데 있는 태양'이라고 불렸던 티치아노는 646점의 작품을 제작한 그사 살던 시대에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아주 생산적인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적 소재를 다루고 종교적 주제를 담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성스런 사랑과 세속의 사랑>, <성모 승천>, <바쿠스의 축제>,〈우르비노의 비너스〉등이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이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색채주의며, 그는 일생 동안 그런 특징을 유지했다. 기나긴 생애의 마지막 무렵 그는 극적인 양식의 단절을 완수했고, 그것은 이미 바로크적 특성을 향해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티치아노의 작품은 모든 중요한 수집품, 예를 들면 바티캄 미술 소장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대귀족, 데스테 가문, 곤차가 가문, 파르네세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과 같은 지배자 귀족 가문들도 자신들의 소장품을 위해서 수 많은 작품을 사들였다. 티치아노의 작품은 그가 살아 있던 동안에도 판화와 복사본의 형태로 수용되었다. 랑베르 수스트리스(Lambert Sustris)나 자코포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와 같이 16세기의 명망있던 화가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그의 화법과 특히 그의 색채 처리는 그의 동시대 화가들만이 아니라 후세대의 화가들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범위는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에서부터 시작해서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를 거쳐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까지 이어졌다. 

title: 엘리자베스 1세
start: 1533-9-7
end: 160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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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잉글랜드, 군주
description: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는 1558년 11월 17일부터 1603년 3월 24일까지 44년간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이다.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조국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녀는 늘 “과인(寡人)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title: 악바르
start: 1542-10-14
end: 160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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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무굴 제국, 군주
description: 
	악바르(Abu'l-Fatḥ Jalāl ud-Dīn Muḥammad Akbar, 1542년 11월 23일 - 1605년 10월 12일)는 무굴 제국을 통치한 제3대 황제(재위: 1556년 - 1605년)이다. 아랍어로 위대(偉大)하다는 의미를 지닌 악바르(아크바르)라는 이름에 걸맞게 중앙 아시아에서 들어온 외지인이었던 조부 바부르가 세운 무굴 제국을 진정한 제국이란 이름에 걸맞은 국가로 발전시켜,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 اکبر کبیر)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title: 튀코 브라헤
start: 1546-12-14
end: 1601-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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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천문학자
description:
	 튀코 브라헤(덴마크어: Tycho Brahe, 1546년 12월 14일 ~ 1601년 10월 24일)는 덴마크의 천문학자이다. 로스토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1572년,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신성을 발견하여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을 때까지 14개월간 관측을 계속하여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재능이 인정되어 덴마크왕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참고 1] 의 지원을 받아 벤 섬에 우라니보르 천문대, 스티에르네보르 천문대를 건설하고 방대하고 정밀한 관측기록을 남긴다. 프레데리크 2세가 죽은 후, 159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 황실부 제국수학관에 초청되어 프라하로 이주한다.

title: 천명제(누르하치)
start: 1559
end: 1626-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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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청나라, 군주,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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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명제(天命帝, 1559년 ~ 1626년 9월 30일, 재위 : 건주여진 1583년 ~ 1616년, 후금 1616년 ~ 1626년)는 후금의 초대 황제로, 뒤에 청나라의 초대 황제인 태조로 여겨지게 되었다. 휘는 아이신교로 누르하치(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ᠨᡠᡵᡤᠠᠴᡳ|Aisingioro Nurgaci}}, 애신각라 노이합적).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연호는 천명(天命)이며,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줄여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ᡨᠠᡳᡯᡠ
ᡩᡝᡵᡤᡳ
ᡥᡡᠸᠠᠩᡩᡳ|타이주 더르기 후왕디}})이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그 이름은 그의 조부인 아이신교로 교창가가 지어준 이름인데, '멧돼지 가죽만큼 질기고, 그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라'는 의미라고 한다. 만주어로는 압카이 푸링가 한(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ᠾᠠᠨ|Abkai Fulingga Han}})이라고 하고 몽골어로는 텡게린 보쇽투 한(ᠲᠡᠭᠷᠢ ᠶᠢᠨ
ᠪᠣᠰᠣᠭᠲᠣ
ᠻᠠᠭᠠᠨ|Tengriyin süldetü Khaan}})이라고 부른다.

title: 프랜시스 베이컨
start: 1561-1-22
end: 16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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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영국, 철학자
description: 
	제1대 세인트앨번 자작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st Viscount of Saint Alban, 1561년 1월 22일~1626년 4월 9일)은 영국의 철학자, 정치인이다. 영국 경험론의 비조이다. 데카르트와 함께 근세 철학의 개척자로 알려진다.

title: 윌리엄 셰익스피어
start: 1564-4-26
end: 1616-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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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영국, 시인,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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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616년 4월 23일)는 영국의 극작가,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영어로 된 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셰익스피어 자신도 최고의 극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자주 영국의 "국민 시인"과 "에이번의 시인"으로 불렸다.

title: 갈릴레오 갈릴레이
start: 1564-12-15
end: 164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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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이탈리아, 물리학자, 천문학자, 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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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고 과학 혁명의 주도자이다. 갈릴레오는 요하네스 케플러와 동시대 인물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와 대립했다. 그의 업적으로는 망원경을 개량하여 관찰한 것, 운동 법칙의 확립 등이 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여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믿었다.(그 당시에는 지구가 중심이라는 것이 진리였다)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자진하여 로마 교황청을 방문, 변명했으나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황금 측량자〉를 저술하여 지동설을 고집하였으며, 〈천문학 대화〉를 검열을 받고 출판했으나 문제가 생겨 로마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갈릴레오는 결국 그의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고, 그의 마지막 생애를 로마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가택에서 구류되어 보냈다.
	
	그는 실험적인 검증에 의한 물리를 추구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의 물리학의 시작을 대개 갈릴레오의 것으로 본다. 또한, 진리의 추구를 위해 종교와 맞선 과학자의 상징적인 존재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종교계와의 대립과는 상관없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런 대립도 자신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물리학 입문 과정에서 배우는 등가속 물체의 운동은 운동학으로서 갈릴레오에 의해 연구되었다. 그의 관측적 천문학의 업적은 금성의 위상과, 그를 기리기 위해 갈릴레이 위성이라 불리는 목성의 가장 큰 네 개 위성의 발견, 태양 흑점의 관측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또한 나침반 디자인의 개량 등 과학과 기술에 기여하였다. 그의 최대 공적은 과학적 연구 방법으로써 보편적 수학적 법칙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적 분석을 확립한 점에 있다고 평가되며, '근대 관측천문학의 아버지',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또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

title: 요하네스 케플러
start: 1571-12-27
end: 163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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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점성술사, 천문학자, 수학자
description: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년 12월 27일 - 1630년 11월 15일)는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점성술사이자 17세기 천문학 혁명의 핵심 인물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행성운동법칙으로 유명하며, 후대의 천문학자들은 그의 저작 《신천문학》, 《세계의 조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를 바탕으로 그 법칙을 성문화하였다. 또한 이 저작들은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다.
	
	생애 동안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신학교의 수학 선생,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의 조수, 루돌프 2세, 마티아스, 페르디난트 2세 등 세 황제를 모신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의 수학 선생, 발렌슈타인 장군의 점성술사라는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는 광학 연구 분야의 초석을 닦았으며, 굴절 망원경을 개조하여 성능을 향상시켰으며(케플러식 망원경), 동시대의 인물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데 공헌하였다.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천문학(자유 인문의 범위 내에 있는 수학의 한 가지)과 물리학(자연 철학의 한 가지) 사이에는 확고한 경계가 있었다. 그는 신이 ‘이성의 자연적인 빛’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적 계획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념에 차 있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자신의 저술 속에 종교적 논쟁과 과학적 추론을 융합시켰다. 케플러는 천문학을 보편적 수리물리학의 한 갈래로 인식함으로써 고대의 물리학적 우주론의 전통을 바꾸었고, 자신의 새로운 천문학을 이른바 “천체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의 여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에 관하여》의 보충”이라고 묘사했다.

title: 페테르 파울 루벤스
start: 1577-6-28
end: 16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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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벨기에, 화가
description: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년 6월 28일 ~ 1640년 5월 30일)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이다. 루벤스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역동성, 강한 색감, 그리고 관능미를 추구하는 환상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루벤스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그리고 교회 제단을 위해 그린 반종교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로 유명하다. 
	
	루벤스는 유럽 전역의 여러 귀족과 미술품 수집가에게 유명했던 안트베르펜의 화실을 운영했으며, 그는 인문학자이자 미술품 수집가,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기사 칭호를 부여받은 외교관이었다.

title: 르네 데카르트
start: 1596-3-31
end: 16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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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프랑스, 수학자, 철학자
description: 
	르네 데카르트([ʁəne dekaʁt], Renatus Cartesius, 1596년 3월 31일 - 1650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본인의 대표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0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즈(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한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1626년부터 2년 동안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하며 미완성 논문 <정신지도의 규칙>을 쓴다. 1628년 말,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저술활동에 몰두해 《세계론》(Traite du monde)을 프랑스어로 출판한다. 1637년에는 《방법서설》에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가지 부분을 덧붙여 익명을 출판했다가 후에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완성한다. 1644년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원리》를 출판한다. 그 후 그는 여러 사람과 편지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1649년 출판된 그의 마지막 책, 《정념론》(Les passions de l'ame)이 된다. 1650년 2월 11일, 그는 폐렴에 걸려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title: 올리버 크롬웰
start: 1599-4-25
end: 165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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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잉글랜드, 정치인, 장군, 군인
description: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은 영국의 정치가이며 군인이다. 청교도 혁명으로 영국의 군주제를 폐한 1653년 12월 6일부터 죽을 때까지 호국경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렸다.

title: 로버트 보일
start: 1627-1-25
end: 169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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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아일랜드, 화학자, 물리학자,영국
description: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년 1월 25일 ~ 1691년 12월 30일)은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잉글랜드의 자연철학자, 화학자, 물리학자이다. 보일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일의 연구와 철학은 연금술적 전통에서 출발하였으나 근대 화학의 기초를 세웠다고 평가된다. 그의 저서 《의심 많은 화학자》는 화학의 기반을 마련한 책이다.

title: 존 로크
start: 1632-8-29
end: 170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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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영국, 철학자
description: 
	존 로크(John Locke, 1632년 8월 29일 - 1704년 10월 28일)는 잉글랜드 왕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이다. 
	
	로크는 영국의 첫 경험론 철학자로 평가를 받지만, 사회계약론도 동등하게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사상들은 인식론과 더불어 정치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장 영향력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자유주의 이론가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들은 볼테르와 루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혁명뿐만 아니라 여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은 미국 독립 선언문에 반영되어 있다.
	
	평화·선의·상호부조가 있는 낙원적 자연 상태에서 노동에 의한 자기 재산을 보유하는 자연권의 안전 보장을 위하여 사회 계약에 의해서 국가가 발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임무는 이 최소한의 안전보장에 있다고 하는 야경국가론이다. 그것을 위한 권력으로서 국민은 계약에 의하여 국가에 그것을 신탁(信託)하였다고 주장하여 국민 주권에 기초를 두었으며, 명예혁명 후의 영국 부르주아 국가를 변론하고 영국 민주주의의 근원이 되었다.
	
	로크의 정신에 관한 이론은 "자아 정체성"에 관한 근대적 개념의 기원으로서 종종 인용되는데, 데이비드 흄과 루소 그리고 칸트와 같은 이후의 철학자들의 연구에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로크는 "의식"의 연속성을 통해 자아를 정의하려 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또한 정신을 "빈 서판"(백지 상태, 즉 "타블라 라사")으로 간주하였는데, 데카르트나 기독교 철학과는 다르게 사람이 선천적 관념을 지니지 않고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title: 아이작 뉴턴
start: 1642-1-25
end: 172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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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잉글랜드,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신학자
description: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7년 3월 20일)은 학자들과 대중들에게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1명으로 꼽히던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의 발달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화 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인  f(x) = 0 을 푸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 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2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title: 안토니오 비발디
start: 1678-3-4
end: 174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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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이탈리아, 작곡가,바이올린 연주자
description: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년 3월 4일 - 1741년 7월 28일)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성직자이며,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붉은 머리의 사제(司祭)(il Prete Ross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된 '사계'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title: 볼테르
start: 1694-11-21
end: 1778-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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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프랑스, 철학자, 작가,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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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 Marie Arouet)는 필명인 볼테르 (Voltaire, 1694년 11월 21일 ~ 1778년 5월 30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이다. 《샤를 12세의 역사》, 《루이 14세의 시대》,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 《캉디드》 등이 대표작이다.

title: 마리아 테레지아
start: 1717-5-13
end: 178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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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신성 로마 제국, 황후,헝가리,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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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테레지아(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어 테레지어, 마리어 테레시에,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뵈멘, 만토바, 밀라노,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파르마등의 통치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로렌 공작 부인이 되었으며, 후에 토스카나 대공비, 신성로마황후의 지위를 얻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1713년 국사조칙에 의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로 공표되었으며, 카를 6세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영토들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카를 6세 사후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에서는 그녀의 계승의 반발하였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되지만,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내주는 대신 각 국으로부터 그녀의 승인을 인정받는다. 그녀는 후에 슐레지엔을 찾으려고, 7년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녀는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혼인하였는데,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자녀들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를 비롯하여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파르마의 공비 마리아 아말리아 등이 있다.
	
	그녀가 생전에 사용했던 칭호는 Königin(여왕)과 Kaiserin(황후)의 머릿글자를 딴 ‘K.K’이다.

title: 애덤 스미스
start: 1723-06-05
end: 179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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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영국, 경제학자,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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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둠 스미스 또는 아다 스미스(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다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남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어머니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심화를 제공했다.

title: 조지 워싱턴
start: 1732-02-22
end: 179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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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미국, 정치인, 군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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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년 2월 22일 ~ 1799년 12월 14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년~1797년)이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의 대국민들이 그를 국왕과 같은 군주로 인식하여 서로 거리감을 느꼈으나, 점차 미국의 건국과 혁명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으로 등극했다.
	
	1775년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을 때까지 총사령관으로서 복무하였다. 워싱턴은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하여야 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후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의 영국의 국왕인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787년, 조지 워싱턴은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를 주재하였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워싱턴은 해외 문제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택하였다. 1795년 워싱턴은 전쟁을 회피하고자 영국과 제이 조약을 맺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그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이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하였지만, 워싱턴은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하였다. 워싱턴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성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퇴임 연설에서 당파성과 파벌주의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의 가담 등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인 덕목을 강조하였다.
	
	워싱턴은 1799년에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title: 요제프 하이든
start: 1732-3-31
end: 1809-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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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오스트리아,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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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년 3월 31일 - 1809년 5월 31일)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슈베르트와 함께 16살에도 소년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던 음악가이다.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 시대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ö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title: 프란시스코 고야
start: 1746-03-30
end: 182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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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스페인, 화가
description: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년 3월 30일 - 1828년 4월 16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 특히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title: 요한 볼프강 폰 괴테
start: 1749-8-28
end: 183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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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철학자, 정치인, 소설가, 시인, 극작가
description: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 ~ 1832년 3월 22일)는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이다. 바이마르 대공국에서 재상직을 지내기도 하였다.

title: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start: 1756-1-27
end: 17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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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작곡가, 작곡가
description: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는 오스트리아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출생 직후에 가톨릭의 성당에서 받은 세례명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였다. 흔히 알려진 중간 이름인 아마데우스(Amadeus)는 세례명에 있는 중간 이름 중 하나인 테오필루스(Theophilus)를 같은 뜻의 라틴어로 바꾼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볼프강의 누나인 난네를을 어려서부터 가르쳤고, 이를 볼프강은 지켜보았다. 세 살 때부터 볼프강은 누나를 보고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이 뚜렷이 빛을 발하게 되면서 작곡을 그만두었고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매우 뛰어났다. 난네를의 뮤직북에 쓰여진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볼프강은 네 살 때 여러 곡을 배웠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은 빠르게 발달하여, 다섯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믿지 못하여 일부러 모차르트의 집에 찾아와서 모차르트를 시험해 보았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가 모차르트의 곡을 써주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난 작곡 실력과 재능을 보였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모차르트를 믿기 시작하였다.
	
	1777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뮌헨, 만하임, 파리를 여행하였는데, 그 와중에 파리에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가운데에 볼프강, 왼쪽에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 오른쪽에 레오폴트 모차르트, 벽에 죽은 어머니의 초상화]]
	여행을 다니면서 모차르트는 많은 음악가들과 만났는데, 그중에서 1764년에서 1765년 사이에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바흐로부터 처음으로 교향곡을 작곡하는법을 배웠으며 이러한 토대로 모차르트는 사후까지 수많은 걸작의 교향곡을 남기는 중요한 계기가된다.

title: 루트비히 판 베토벤
start: 1770-12-17
end: 1827-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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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작곡가
description: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에는 〈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등이 있다.

title: 찰스 다윈
start:  1809-2-12
end: 188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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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영국, 생물학자, 지질학자, 박물학자
description: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FRS, 1809년 2월 12일~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뒤 저서 종의 기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진화론을 발표하여 논란이 되었다.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종의 기원》 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인간과 원숭이는 공통 조상을 갖는다'는 날짜=2012-01-26 그의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진화론과 창조론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

title: 카를 마르크스
start: 1818-05-05
end: 188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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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교육자, 경제학자, 철학자, 혁명가
description: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title: 마크 트웨인
start: 1835-11-30
end: 19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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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미국, 소설가
description: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 1835년 11월 30일 ~ 1910년 4월 21일)는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필명으로 더욱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인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동화 《톰소여의 모험》이 있다.

title: 프리드리히 니체
start: 1844-10-15
end: 19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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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독일, 철학자
description: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ˈfʁiːdʁɪç ˈvɪlhɛlm ˈniːt͡sʃə, 1844년 10월 15일~1900년 8월 25일)는 독일의 철학자이며 문헌학자, 계보학자, 예술가이다. 그는 '망치를 든 철학자'이자 폭발적인 인간이다. 니체는 전통 사상들과 개념들을 대대적으로 재평가한 문화 비평가였다. 그는 가치론, 존재론, 미학, 윤리학, 심리학, 계보학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니체사상의 영향은 문화의 제반영역에 남아있는데, 특히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 영향이 강하다.
	
	니체는 젊은시절 그리스 고전 문헌을 연구했다. 24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문헌학 교수가 되었고, 교수 활동을 하며 그리스 고전 문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이 때의 연구가 후기 사상의 토양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의 저작으로는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등의 작품이 있다. 보불전쟁에 참전하여 질병을 얻고 평생 질환에 시달린다. 그로인해 1879년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이후 십년간 집필에 매진하여,《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등의 주요작을 남겼다. 1889년 초에 심각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여 이후 다시는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후 19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어머니와 여동생의 돌봄을 받으며 살았다.
	
	니체 이전의 서양전통에서는 세계를 이승과 저승으로 구분하여, 이승을 의미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저승을 '영원한 하늘나라' 혹은 '이데아 세계'라고 부르고 있었다. 니체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며 '지상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종용하였다. 또한 지상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폐적인 인간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나 '근본적인 가치'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허무주의자이다.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저편세계를 상정하는 모든 종류의 이상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노동자 천국' 등인데 특이하게도 민주주의를 기독교의 아류로 생각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반유대주의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인종주의자였던 여동생이 니체의 책을 조작하여,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 어용 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이용되기도 했다. 니체의 문체 및 진리와 가치에 대한 그의 질문들은 중대한 해석의 문제를 제기했고, 현상학과 분석철학 모두에서 방대한 2차 문헌들이 생겨났다.

title: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start: 1879-3-14
end: 195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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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미국, 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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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앨버트 아인스타인,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은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이다. 
	그의 일반 상대성이론은 현대 물리학에 혁명적인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21년 광전효과에 관한 기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title: 체 게바라
start: 1928-5-14
end: 1967-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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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쿠바, 정치인, 혁명가, 군인, 의사
description: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는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이자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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