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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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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연대표 - 데이터(세계)

연대표 보기 : http://sseeookk.tistory.com/entry/역사인물-연대표


title: 호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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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시인,  작가, 음유 시인,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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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메로스,(盲人, 오미로스, 기원전 8세기 경)는 고대 그리스의 유랑시인이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와 수편의 시인의 작가이며 맹인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정확한 생몰 년대는 미상이다. 영어식 이름인 호머(Homer)로도 알려져 있다.

title: 	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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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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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釋迦牟尼 · Śākyamuni, 기원전 624?~544?[1])는 불교의 교조이다. 석가는 부족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 석존 · 불 · 여래 등의 10가지 존칭과 아명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라고 칭한다.
	
	샤카족의 중심지인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하거나 고행을 하였으나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가 긴요함을 알았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선정을 수행하여 35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붓다, 佛陀)가 되었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을 편력하며 교화에 힘썼고 쿠시나가라에서 80세로 입멸하였다.

title: 피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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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수학자, 철학자, 기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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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타고라스(Πυθαγόρας, 기원전 580년 경 - 기원전 490년 경)는 이오니아의 그리스 철학자이자, 피타고라스 학파라 불린 종교 단체의 교주이다. 피타고라스에 관해 알려진 정보가 대부분 그가 죽고 수세기 후에 쓰여진 것이라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매우 드물다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아마 이집트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학식을 닦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530년 즈음, 피타고라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토네로 이동하여 종교적인 학파를 세웠다.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은 피타고라스가 개발한 종교적 의식과 훈련을 수행하고 그의 철학 이론을 공부했다. 학파는 크로톤의 정치에도 적극 간섭했는데, 이가 결국 그 자신들이 몰락을 불러왔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만나던 건물은 방화당했고 피타고라스는 도시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말년을 메타폰툼에서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 말 피타고라스는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종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위대한 수학자나 신비주의자, 과학자로서 흔히 추앙받으며, 특히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정리인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뿐 아니라 그에 관한 전설과 혼란으로 그의 실제 공적이 흐려져서, 누가 그의 가르침에 관해 자신있게 답을 주기가 힘들고, 일부는 그가 수학과 자연철학에 기여를 남겼다는 사실에까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피타고라스에게 돌려진 많은 공적은 어쩌면 사실 그 동료나 제자의 공적이었을 것이다. 또 그의 제자들이 모든 것은 수이며 수야말로 궁극적인 본질이라는 사실을 믿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피타고라스는 최초로 스스로를 철학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 사람이라고 한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플라톤과, 그를 통해 서양 철학 전체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title: 페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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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정치가, 웅변가, 장군,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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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리클레스(Περικλῆς, 기원전 495년경 ~ 429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웅변가, 장군으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이에 아테나이의 황금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의 모계는 역사상 영향력있었던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출신이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쳐, 당대 역사가 투퀴디데스는 그를 이르러 "아테네의 제1시민"이라고 칭하였다. 그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아테네 제국을 세우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개전 후 2년 동안 아테네를 이끌었다. 그가 아테네를 지도하던 시기인 기원전 461년경에서 561년경 사이는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하기도 하며, 때로는 이 시기를 더 이전인 페르시아 전쟁까지 잡거나, 다음 세기 이후까지 잡기도 한다.
	
	페리클레스는 예술과 문학을 장려하였는데, 덕분에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건축물을 짓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이 건물은 아직까지 대부분 현존하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건축 계획은 도시를 꾸미고, 아테네의 영광을 드러내었으며, 인민에게 일거리를 제공하였다. 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정을 육성하였으며, 비판자들은 그를 이르러 대중 영합 정치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title: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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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교육자, 정치인, 철학자
description: 
	소크라테스(소크라티스,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와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원전 399년에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흔히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불린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title: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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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철학자
description: 
	플라톤(Greek: Πλάτων, ''Plátōn'', "넓은, 어깨 폭이 넓은"; 기원전 428/427 또는 424/423  – 기원전 348/347)은 서양의 다양한 학문에 영향력을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고, 현대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아카데메이아(academia)를 아테네에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그의 실제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 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들에 대해 저술하였다. 플라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대화편이다. 비록 일부 편지들은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에 의한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스 I'과 '클레이토폰'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의심스럽거나 또는 '데모도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I'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대개는 위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편지들은 대개 거의 모두 위조된 것으로 여겨지며, 일곱번째 편지만이 예외로서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내용과 주장 중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견해인지에 대한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것도 글로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 이라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플라톤의 많은 아이디어들,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들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것을 빌려오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다.

title: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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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우주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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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84년 ~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 윤리학, 도덕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동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에 대한 형식 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 되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1400년 까지의 중세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특히 가톨릭 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편의 품위있는 논문과 대화록을 저술했음에도(키케로는 그의 문체를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고 묘사하였다.) 오늘날 그가 쓴 글의 대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쓴 글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다.

title: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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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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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 감마 호 메가스, 알렉산데르 테르티우스 마그누스, 알 이스칸다르 알 탈리트 알 아크바르 기원전 356년 7월 말 ~ 기원전 323년 6월 10일)는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돈의 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이다. 그리스 폴리스 제국(諸國)과 오리엔트 지방에 대한 공격적 팽창으로 패권을 잡아 마케돈의 바실레우스(군왕), 코린토스 동맹의 헤게몬(패자),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임하고 스스로를 퀴리오스 티스 아시아스(아시아의 주主)라고 칭하였다.
	
	기원전 356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20세의 나이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바실레우스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치세 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미증유의 군사 정복 활동으로 보냈고, 30세가 되었을 때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그 이전까지 고대 서양에 전례가 없던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전투에서 져 본적이 없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유년기의 알렉산드로스는 16세가 될 때까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기원전 336년 부왕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개척한 부강한 왕국과 숙련된 군대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에 이어 코린토스 동맹의 패자로 추대된 알렉산드로스는 그 권위를 이용해 팽창 정책을 시작했다. 기원전 334년 그는 소아시아에서 군림하던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10년에 걸친 원정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 등 몇 차례의 결정적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분쇄했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페르시아 제1제국을 멸망시켰다.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돈 제국의 강역은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렀다.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인도를 침공했으나 병사들의 반발로 회군하였다.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삼기 위한 개발을 계속하던 와중이었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는 계획했던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시작하지 못한 채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그가 죽자마자 일련의 내전으로 산산이 조각났고, 조각난 각각의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들과 참모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각각 왕을 칭하고 할거하였다. 이들을 디아도코이라 한다.

title: 아르키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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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기하학자,철학자, 공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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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키메데스(Ἀρχιμήδης, 아르히미디스, 약 기원전 287년 ~ 기원전 212년)는 고대 그리스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일부였던 시라쿠사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겸 공학자이다. 그의 생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얼마 되지 않으나 고전 고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물리학 분야에서 정역학과 유체정역학을 연구했으며 지레의 원리를 설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아르키메데스 나선양수기, 해상에 있는 배를 공격하기 위한 거울 등의 기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고전 고대 시기의 가장 뛰어난 수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학과 관련한 아르키메데스의 업적으로는 실진법의 도입, 포물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의 넓이 계산, 원주율의 계산과 같은 것들이 있다.

title: 아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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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인도, 불교도,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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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소카는 인도 마가다 국 제3왕조인 마우리아 제국의 세 번째 임금으로 인도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왕이다(재위: 기원전 265년경 ~ 기원전 238년 혹은 기원전 273년경 ~ 기원전 232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야의 손자이며,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의 하나이자 황제 중의 황제인 전륜성왕(samrāṭ Chakravartin)으로 인용된다. 아소카는 수많은 군사 정복뒤에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아소카의 제국은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서쪽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동쪽으로는 인도의 아삼 주 남쪽으로는 미소레 주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느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곳곳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정리하였으며, 실론·타이·버마에까지 불교를 전파하기에 노력하였다. 총애하는 왕비를 잃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죽었으며,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 

title: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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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역사가, 시인, 내시, 작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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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 천(스마첸,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은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이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물려받아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이릉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릉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진 사건에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을 받게 된 것이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히어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실제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를 사가가 해석한 글로 존중받는다.

title: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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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로마, 정치인, 집정관, 철학자
description: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1월 3일 - 기원전 43년 12월 7일)는 로마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이다.

title: 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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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로마, 군인, 정치인, 장군
description: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7월 12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 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52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급기야 자신을 종신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 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 플루타르코스, 카시우스 디오, 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title: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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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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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기원전 약 7~2년 ~ 기원후 약 26~36년 또는 기원후 4년) 또는 나사렛의 예수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몸인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에 따라 예수를 동정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강생한 하느님(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느님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칼케돈 공의회)하기도 한다. 흔히 메시아라는 뜻의 존칭인 그리스도를 붙여 예수 그리스도라 부른다. 
	
	기독교 중 일부 교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 하느님(하나님)이 아닌, 하느님(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하느님(하나님)의 아들로서 신격을 가졌지만 하느님(하나님)과는 서로 다른 존재로 여기기도 하는 등 논란은 있다. 예수의 생애와 행적은 사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랍비 중 한 사람으로 여기며,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무함마드에 앞선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여긴다.

title: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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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그리스, 수학자, 철학자,이집트, 천문학자
description: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Κλαύδιος Πτολεμαῖος, AD 83년경 ~ 168년경)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점성학자이다. 고대 이집트의 테바이드에서 태어났을 것이라 추정되며, AD 168년쯤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다. 
	
	이름 중 클라우디오스(Claudius)는 고대 로마의 둘째 이름으로 족명(族名)을 나타내며 이것은 그가 로마 시민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첫째 이름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당시 시민들의 일반적인 첫째 이름이 티베리우스(Tiberius)인 걸 감안하면 그의 첫째 이름도 티베리우스(Tiberius)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는 그리스식 이름이며 이집트의 왕가의 이름이었지만 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인척 관계라고는 여겨지지 않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사회 일원이라는 것 외에 삶의 세밀한 부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어로 책을 썼고 바빌론 천문학 데이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이러한 그의 저서들은 후의 이슬람과 유럽 과학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코페르니쿠스 이전시대 최고의 천문학서로 인정받고 있는 《천문학 집대성》(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있는데 이것의 아랍어 역본인 《알마게스트》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또한 지리학분야의 《지리학》(Geography, Geographike Hyphegesis)이 학계에서 오래도록 아낌을 받았고, 점성술책인 《테트라비블로스》(四元의 數, Tetrabiblos)도 아랍세계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밖에도 광학과 음악에 관한 여러 저서가 있다.

title: 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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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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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틸라(Attila, 아틀리끔찍한 자, 에첼, 406년 ~ 453년)는 훈족 최후의 왕이며 유럽 훈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title: 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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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슬람교, 군주,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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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함마드مُحَمَّد Ar-muhammad.ogg, 570년경~632년 6월 8일}는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성사(聖使)이다. 흔히 마호메트 또는 모하메드(Mohammed, Muhammad, Mahomet)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함마드를 영어로 쓴 것을 번역한 표현이다.

title: 카롤루스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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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신성 로마 제국,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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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롤루스 대제(740년, 742년 또는 747년 ~ 814년 1월 28일, 카롤루스 마그누스, 카를 데어 그로세, 샬리메인, 샤를마뉴, 카를로마뇨)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서부, 중부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확장했다. 재임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800년 12월 교황 레오 3세에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반대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카롤루스 대제의 국내외적인 업적은 서유럽과 중세시대를 정의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신성 로마 제국 등의 재임연표에서는 샤를 1세 또는 카를 1세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피핀의 뒤를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국을 위협하던 사라센과 전쟁을 일으키던 중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언급되었던 론세스바예스 전투(779년)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기도 하였으나 교황의 보호자가 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아갔다. 또한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굴복시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 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 출발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스, 독일 군주의 시초 인물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이후 최초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 시켰으며 또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사후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대제'로 번역되는 마그누스(라틴어) 또는 마뉴(프랑스어)의 칭호를 얻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카롤루스 대제 또는 샤를(라틴어 이름 카롤루스의 프랑스어 발음)마뉴라고 불린다. 또한,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라고 부른다.

title: 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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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몽골, 군인, 군주, 중국
description: 
	칭기즈 칸(Činggis Qaγan, 성길사한, 1162년 4월 16일 ~ 1227년 8월 18일)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점유한 몽골 제국의 창업자이자 초대 카간이다. 원래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진(패아지근 철목진)이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출신이 아닌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합리적 인사제도인 능력주의에 기반한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사,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중국사에는 원(元) 태조(太祖)로 기록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몽골 칭기즈 칸 국제공항으로 남아 있다.

title: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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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탈리아, 귀족, 가톨릭 성인, 철학자,스콜라 철학자, 신학자
description: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년? ~ 1274년 3월 7일)는 기독교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그는 자연 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를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title: 마르코 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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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베네치아 , 상인, 탐험가
description: 
	마르코 폴로(Marco Polo, c.1254년 9월 15일 – 1324년 1월 8-9일)는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동방견문록》을 지은 작가이다.

title: 단테 알리기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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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132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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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탈리아, 시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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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년 3월 1일경 ~ 1321년 9월 13일 또는 9월 14일)는 두란테의 약칭인 단테(Dante)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시인이다. 피렌체의 알리기에리 혹은 알라기에리(Alagh(i)eri) 가문의 일원이다(단테의 아들 야코포의 설명: “Durante olim vocatus Dante, condam Alagherii de Florentia”). 두란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은 "장수하는 날개가 달린 자"라는 뜻인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남긴 다양한 영향들의 결과를 예언한 실로 상징적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title: 조반니 보카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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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탈리아,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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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 1375년)는 이탈리아의 소설가·시인이다.

title: 홍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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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원나라, 승려, 도적, 명나라, 황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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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 태조(明太祖, 원 천력 원년 9월 18일(1328년 10월 21일) ~ 홍무 31년 윤 5월 10일(1398년 6월 24일)은 명나라(明)의 태조(재위 : 1368년 ~ 1398년)이다. 성은 주(朱), 이름은 원장(元璋), 초명은 중팔(重八), 흥종(興宗), 덕유(德裕) 자는 국서(国瑞), 묘호(廟號)는 태조이다.
	
	호주(濠州)의 한족 빈농가문에서 태어나 고아가 되었다. 그 뒤 빈한한 환경에서 자라 탁발승으로 지내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곳을 전전하다 홍건적(紅巾賊) 참여해 홍건적의 부장 곽자흥의 휘하에서 활약하다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1366년 스스로 명왕이라 칭하고 각지의 군웅들을 굴복시킨 뒤 1368년 스스로 자립해 황제에 올라 주씨명국을 건국했다. 이후 그는 한족 왕조 회복의 기치를 명분으로 하고, 지방관의 행정, 입법, 군사 권한을 분산시켜 서로 견제하게 하는 한편 중서성을 혁파하고 6부 상서들에게 직접 결제받는 등,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황권 강화를 꾀하였다.
	
	반원, 반몽골과 한족의 국가 재건을 기치로 북벌군을 일으켜 직접 지휘, 1388년 몽골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축출하고 중원을 통일했다. 왕조 성립 뒤에는 지역 토호 및 공신세력을 숙청하고 지방관 파견과 제후국 봉지 임명 등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시켰다. 또한 한족의 문화를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유교 사상에 따라 자급자족 농경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고, 대외적으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공신들의 대량숙청을 감행하는 비정상적인 공포정치를 펼쳤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다.

title: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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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발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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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추르 라덴 춤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년경 ~ 1468년 2월 3일)는 약 1440년 경에 금속 활판 인쇄술을 사용한 독일의 금(金) 세공업자이다. 본명은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Johannes Gensfleisch)이고, 구텐베르크는 통칭이다. (영미권에서는 구텐버그라고 발음한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활자 설계, 활자 대량 생산 기술을 유럽에 전파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업적은 이런 기술과 유성 잉크, 목판 인쇄기 사용을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활자 제작 재료로 합금을 사용하고, 활자 제작 방식으로 주조를 채용하였다.

title: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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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프랑스,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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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또는 성녀 요안나 아르크(Sancta Ioanna de Arc)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오를레앙의 성처녀(la Pucelle d’Orléans)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가톨릭교회에서는 모든 성인의 이름을 라틴어식으로 명명하기 때문에, 잔 다르크를 아르크의 요안나 또는 요안나 아르크라고 부른다. 따라서 세례명으로 쓸 때는 요안나라고 명명한다. 프랑스 동부 지역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부르고뉴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현상금과 맞바꾸어 잉글랜드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를 재판장에 세워 반역과 이단의 혐의를 씌운 후에 말뚝에 묶어 화형에 처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였다.
	
	그로부터 25년 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재판소는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여 그녀에게 내린 혐의는 모두 무혐의이며 따라서 무죄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순교자로 선언하였다. 잔 다르크는 1909년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잔 다르크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 루이,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등과 더불어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오늘날 잔 다르크는 서구 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특히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서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때 프로파간다에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소재로 자주 쓰였으며, 군인들은 잔 다르크의 탄생지인 동레미라퓌셀(라퓌셀은 처녀라는 뜻으로, 잔 다르크를 기려 본래의 지명 동레미에 추가되었다)을 순례하기도 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를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와 만화, 소설, 회화 등의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잔 다르크는 흔히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탄 여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title: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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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이탈리아,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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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크리스토발 콜론, 크리스토방 콜롬부, 1450년 또는 1451년 제노바 ~ 1506년 5월 20일 바야돌리드)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title: 레오나르도 다 빈치
start: 1452-4-15
end: 1519-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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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르네상스,이탈리아, 화가, 건축가, 조각가, 발명가
description: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

title: 니콜로 마키아벨리
start: 1469-5-3
end: 1527-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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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탈리아, 철학자
description: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년 5월 3일 ~ 1527년 6월 21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사상가, 정치철학자이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title: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start: 1473-2-19
end: 154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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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폴란드,  천문학자
description: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 미코와이 코페르니크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가져온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다. 여러가지 이름 표기는 그가 태어난 곳(폴란드)과 그의 모국어(독일어) 그리고 그가 즐겨 쓴 라틴어를 감안하여 세가지 언어로 표기한다. 인공원소 코페르니슘의 이름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그는 라틴어,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두 말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현재의 폴란드 중북부에 있는 당시의 한자동맹 도시인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에서 관리이자 주철업을 하는 아버지 니콜라스 코페르니크과 당시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방 출신인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 사이에서 네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 밑에서 여의고 토룬에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당시 독일의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지방의 대도시 크라카우(현 크라쿠프)로 가 대학에 입학하여 1494년까지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149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가 삼촌의 권유로 신학과에 입학한다.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코페르니쿠스는 또한 로마 및 파도바 대학에 등록하여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논의에만 몰두하던 스콜라학의 학통을 따르지 않고 천체관측과 궤도 계산을 위주로 하던 실지천문가였다.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성질에 대한 통념이 기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암흑기에서 과학혁명으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는데, 이것은 당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코페르니쿠스가 행했던 인간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객관적인 입장의 태양중심설로의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이른다.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었다.
	
	이탈리아 유학시기 접한 플라톤주의와 고대문헌 조사의 영향으로 지동설을 구상하게 된 코페르니쿠스는 레기오몬타누스가 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핵심적 문제제기가 실린 책 <요약>을 접하고 자신의 우주 모델에 대한 개략적인 생각을 더욱더 발전시켜나갔다. 그 후 1510년에 태양 중심 천문체계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했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해설서Commentariolus>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요약본 형태의 원고를 지인들에게 돌렸다.
	
	[짧은 해설서] 발표 후 코페르니쿠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1543년《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발표한다. 우주와 지구는 모두 구형이며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지구도 원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행성을 하나, 하나 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체계로 보아 행성간의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과 큰 차이점을 두었다.
	
	책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매우 미약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져 나갔다. 1616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금서목록에 추가되기도 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천문학과 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혁명적 씨앗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 많은 과학자들. 특히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title: 마르틴 루터
start: 1483-11-10
end: 154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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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신학자
description: 
	마르틴 루터, 또는 말틴 루터(Martin Luther 또는 Lud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은 그의 저서 《영웅숭배론》에서 루터에 대해 우상파괴적인 에언자이자 사람들을 진실로 되돌린 영웅이며 인간이 지닌 용기의 진정한 표본이라고 평가했다.

title: 티치아노
start: 1488 (어림)
end: 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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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이탈리아,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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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90년경 ~ 1576년)는 북이탈리아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출생한 이탈리아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했던 화가이다. 
	
	그의 창작 시기는 베네치아 회화의 황금기와 맞아 떨어졌다. 그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경제적,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티치아노는 9살이 되었을 때 베네치아로 가서 젠틸레 벨리니와 조바니 벨리니 형제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1513년 그는 산 사물엘레에 자신의 작업장을 열었고, 유럽 전역에서 찬양을 받는 화가로 발전했다. 1533년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1545년 티치아노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청을 받아서 로마를 방문했다. 1548년과 1550년 티치아노는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를 따라서 제국 의회가 있는 아욱스부르크에 갔다. 상당히 고령이었던 티치아노가 1576년 페스트로 죽었을 때 그는, 베네치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화가였다.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별 가운데 있는 태양'이라고 불렸던 티치아노는 646점의 작품을 제작한 그사 살던 시대에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아주 생산적인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적 소재를 다루고 종교적 주제를 담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성스런 사랑과 세속의 사랑>, <성모 승천>, <바쿠스의 축제>,〈우르비노의 비너스〉등이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이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색채주의며, 그는 일생 동안 그런 특징을 유지했다. 기나긴 생애의 마지막 무렵 그는 극적인 양식의 단절을 완수했고, 그것은 이미 바로크적 특성을 향해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티치아노의 작품은 모든 중요한 수집품, 예를 들면 바티캄 미술 소장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대귀족, 데스테 가문, 곤차가 가문, 파르네세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과 같은 지배자 귀족 가문들도 자신들의 소장품을 위해서 수 많은 작품을 사들였다. 티치아노의 작품은 그가 살아 있던 동안에도 판화와 복사본의 형태로 수용되었다. 랑베르 수스트리스(Lambert Sustris)나 자코포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와 같이 16세기의 명망있던 화가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그의 화법과 특히 그의 색채 처리는 그의 동시대 화가들만이 아니라 후세대의 화가들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범위는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에서부터 시작해서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를 거쳐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까지 이어졌다. 

title: 엘리자베스 1세
start: 1533-9-7
end: 160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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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잉글랜드, 군주
description: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는 1558년 11월 17일부터 1603년 3월 24일까지 44년간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이다.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조국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녀는 늘 “과인(寡人)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title: 악바르
start: 1542-10-14
end: 160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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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무굴 제국, 군주
description: 
	악바르(Abu'l-Fatḥ Jalāl ud-Dīn Muḥammad Akbar, 1542년 11월 23일 - 1605년 10월 12일)는 무굴 제국을 통치한 제3대 황제(재위: 1556년 - 1605년)이다. 아랍어로 위대(偉大)하다는 의미를 지닌 악바르(아크바르)라는 이름에 걸맞게 중앙 아시아에서 들어온 외지인이었던 조부 바부르가 세운 무굴 제국을 진정한 제국이란 이름에 걸맞은 국가로 발전시켜,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 اکبر کبیر)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title: 튀코 브라헤
start: 1546-12-14
end: 1601-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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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천문학자
description:
	 튀코 브라헤(덴마크어: Tycho Brahe, 1546년 12월 14일 ~ 1601년 10월 24일)는 덴마크의 천문학자이다. 로스토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1572년,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신성을 발견하여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을 때까지 14개월간 관측을 계속하여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재능이 인정되어 덴마크왕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참고 1] 의 지원을 받아 벤 섬에 우라니보르 천문대, 스티에르네보르 천문대를 건설하고 방대하고 정밀한 관측기록을 남긴다. 프레데리크 2세가 죽은 후, 159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 황실부 제국수학관에 초청되어 프라하로 이주한다.

title: 천명제(누르하치)
start: 1559
end: 1626-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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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청나라, 군주,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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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명제(天命帝, 1559년 ~ 1626년 9월 30일, 재위 : 건주여진 1583년 ~ 1616년, 후금 1616년 ~ 1626년)는 후금의 초대 황제로, 뒤에 청나라의 초대 황제인 태조로 여겨지게 되었다. 휘는 아이신교로 누르하치(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ᠨᡠᡵᡤᠠᠴᡳ|Aisingioro Nurgaci}}, 애신각라 노이합적).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연호는 천명(天命)이며,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줄여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ᡨᠠᡳᡯᡠ
ᡩᡝᡵᡤᡳ
ᡥᡡᠸᠠᠩᡩᡳ|타이주 더르기 후왕디}})이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그 이름은 그의 조부인 아이신교로 교창가가 지어준 이름인데, '멧돼지 가죽만큼 질기고, 그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라'는 의미라고 한다. 만주어로는 압카이 푸링가 한(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ᠾᠠᠨ|Abkai Fulingga Han}})이라고 하고 몽골어로는 텡게린 보쇽투 한(ᠲᠡᠭᠷᠢ ᠶᠢᠨ
ᠪᠣᠰᠣᠭᠲᠣ
ᠻᠠᠭᠠᠨ|Tengriyin süldetü Khaan}})이라고 부른다.

title: 프랜시스 베이컨
start: 1561-1-22
end: 16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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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영국, 철학자
description: 
	제1대 세인트앨번 자작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st Viscount of Saint Alban, 1561년 1월 22일~1626년 4월 9일)은 영국의 철학자, 정치인이다. 영국 경험론의 비조이다. 데카르트와 함께 근세 철학의 개척자로 알려진다.

title: 윌리엄 셰익스피어
start: 1564-4-26
end: 1616-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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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영국, 시인,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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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616년 4월 23일)는 영국의 극작가,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영어로 된 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셰익스피어 자신도 최고의 극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자주 영국의 "국민 시인"과 "에이번의 시인"으로 불렸다.

title: 갈릴레오 갈릴레이
start: 1564-12-15
end: 164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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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이탈리아, 물리학자, 천문학자, 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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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고 과학 혁명의 주도자이다. 갈릴레오는 요하네스 케플러와 동시대 인물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와 대립했다. 그의 업적으로는 망원경을 개량하여 관찰한 것, 운동 법칙의 확립 등이 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여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믿었다.(그 당시에는 지구가 중심이라는 것이 진리였다)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자진하여 로마 교황청을 방문, 변명했으나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황금 측량자〉를 저술하여 지동설을 고집하였으며, 〈천문학 대화〉를 검열을 받고 출판했으나 문제가 생겨 로마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갈릴레오는 결국 그의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고, 그의 마지막 생애를 로마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가택에서 구류되어 보냈다.
	
	그는 실험적인 검증에 의한 물리를 추구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의 물리학의 시작을 대개 갈릴레오의 것으로 본다. 또한, 진리의 추구를 위해 종교와 맞선 과학자의 상징적인 존재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종교계와의 대립과는 상관없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런 대립도 자신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물리학 입문 과정에서 배우는 등가속 물체의 운동은 운동학으로서 갈릴레오에 의해 연구되었다. 그의 관측적 천문학의 업적은 금성의 위상과, 그를 기리기 위해 갈릴레이 위성이라 불리는 목성의 가장 큰 네 개 위성의 발견, 태양 흑점의 관측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또한 나침반 디자인의 개량 등 과학과 기술에 기여하였다. 그의 최대 공적은 과학적 연구 방법으로써 보편적 수학적 법칙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적 분석을 확립한 점에 있다고 평가되며, '근대 관측천문학의 아버지',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또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

title: 요하네스 케플러
start: 1571-12-27
end: 163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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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점성술사, 천문학자, 수학자
description: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년 12월 27일 - 1630년 11월 15일)는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점성술사이자 17세기 천문학 혁명의 핵심 인물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행성운동법칙으로 유명하며, 후대의 천문학자들은 그의 저작 《신천문학》, 《세계의 조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를 바탕으로 그 법칙을 성문화하였다. 또한 이 저작들은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다.
	
	생애 동안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신학교의 수학 선생,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의 조수, 루돌프 2세, 마티아스, 페르디난트 2세 등 세 황제를 모신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의 수학 선생, 발렌슈타인 장군의 점성술사라는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는 광학 연구 분야의 초석을 닦았으며, 굴절 망원경을 개조하여 성능을 향상시켰으며(케플러식 망원경), 동시대의 인물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데 공헌하였다.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천문학(자유 인문의 범위 내에 있는 수학의 한 가지)과 물리학(자연 철학의 한 가지) 사이에는 확고한 경계가 있었다. 그는 신이 ‘이성의 자연적인 빛’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적 계획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념에 차 있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자신의 저술 속에 종교적 논쟁과 과학적 추론을 융합시켰다. 케플러는 천문학을 보편적 수리물리학의 한 갈래로 인식함으로써 고대의 물리학적 우주론의 전통을 바꾸었고, 자신의 새로운 천문학을 이른바 “천체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의 여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에 관하여》의 보충”이라고 묘사했다.

title: 페테르 파울 루벤스
start: 1577-6-28
end: 16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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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벨기에, 화가
description: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년 6월 28일 ~ 1640년 5월 30일)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이다. 루벤스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역동성, 강한 색감, 그리고 관능미를 추구하는 환상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루벤스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그리고 교회 제단을 위해 그린 반종교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로 유명하다. 
	
	루벤스는 유럽 전역의 여러 귀족과 미술품 수집가에게 유명했던 안트베르펜의 화실을 운영했으며, 그는 인문학자이자 미술품 수집가,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기사 칭호를 부여받은 외교관이었다.

title: 르네 데카르트
start: 1596-3-31
end: 16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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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프랑스, 수학자, 철학자
description: 
	르네 데카르트([ʁəne dekaʁt], Renatus Cartesius, 1596년 3월 31일 - 1650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본인의 대표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0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즈(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한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1626년부터 2년 동안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하며 미완성 논문 <정신지도의 규칙>을 쓴다. 1628년 말,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저술활동에 몰두해 《세계론》(Traite du monde)을 프랑스어로 출판한다. 1637년에는 《방법서설》에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가지 부분을 덧붙여 익명을 출판했다가 후에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완성한다. 1644년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원리》를 출판한다. 그 후 그는 여러 사람과 편지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1649년 출판된 그의 마지막 책, 《정념론》(Les passions de l'ame)이 된다. 1650년 2월 11일, 그는 폐렴에 걸려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title: 올리버 크롬웰
start: 1599-4-25
end: 165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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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잉글랜드, 정치인, 장군, 군인
description: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은 영국의 정치가이며 군인이다. 청교도 혁명으로 영국의 군주제를 폐한 1653년 12월 6일부터 죽을 때까지 호국경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렸다.

title: 로버트 보일
start: 1627-1-25
end: 169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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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아일랜드, 화학자, 물리학자,영국
description: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년 1월 25일 ~ 1691년 12월 30일)은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잉글랜드의 자연철학자, 화학자, 물리학자이다. 보일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일의 연구와 철학은 연금술적 전통에서 출발하였으나 근대 화학의 기초를 세웠다고 평가된다. 그의 저서 《의심 많은 화학자》는 화학의 기반을 마련한 책이다.

title: 존 로크
start: 1632-8-29
end: 170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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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영국, 철학자
description: 
	존 로크(John Locke, 1632년 8월 29일 - 1704년 10월 28일)는 잉글랜드 왕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이다. 
	
	로크는 영국의 첫 경험론 철학자로 평가를 받지만, 사회계약론도 동등하게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사상들은 인식론과 더불어 정치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장 영향력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자유주의 이론가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들은 볼테르와 루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혁명뿐만 아니라 여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은 미국 독립 선언문에 반영되어 있다.
	
	평화·선의·상호부조가 있는 낙원적 자연 상태에서 노동에 의한 자기 재산을 보유하는 자연권의 안전 보장을 위하여 사회 계약에 의해서 국가가 발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임무는 이 최소한의 안전보장에 있다고 하는 야경국가론이다. 그것을 위한 권력으로서 국민은 계약에 의하여 국가에 그것을 신탁(信託)하였다고 주장하여 국민 주권에 기초를 두었으며, 명예혁명 후의 영국 부르주아 국가를 변론하고 영국 민주주의의 근원이 되었다.
	
	로크의 정신에 관한 이론은 "자아 정체성"에 관한 근대적 개념의 기원으로서 종종 인용되는데, 데이비드 흄과 루소 그리고 칸트와 같은 이후의 철학자들의 연구에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로크는 "의식"의 연속성을 통해 자아를 정의하려 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또한 정신을 "빈 서판"(백지 상태, 즉 "타블라 라사")으로 간주하였는데, 데카르트나 기독교 철학과는 다르게 사람이 선천적 관념을 지니지 않고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title: 아이작 뉴턴
start: 1642-1-25
end: 172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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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잉글랜드,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신학자
description: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7년 3월 20일)은 학자들과 대중들에게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1명으로 꼽히던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의 발달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화 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인  f(x) = 0 을 푸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 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2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title: 안토니오 비발디
start: 1678-3-4
end: 174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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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이탈리아, 작곡가,바이올린 연주자
description: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년 3월 4일 - 1741년 7월 28일)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성직자이며,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붉은 머리의 사제(司祭)(il Prete Ross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된 '사계'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title: 볼테르
start: 1694-11-21
end: 1778-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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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프랑스, 철학자, 작가,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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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 Marie Arouet)는 필명인 볼테르 (Voltaire, 1694년 11월 21일 ~ 1778년 5월 30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이다. 《샤를 12세의 역사》, 《루이 14세의 시대》,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 《캉디드》 등이 대표작이다.

title: 마리아 테레지아
start: 1717-5-13
end: 178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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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신성 로마 제국, 황후,헝가리,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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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테레지아(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어 테레지어, 마리어 테레시에,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뵈멘, 만토바, 밀라노,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파르마등의 통치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로렌 공작 부인이 되었으며, 후에 토스카나 대공비, 신성로마황후의 지위를 얻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1713년 국사조칙에 의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로 공표되었으며, 카를 6세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영토들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카를 6세 사후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에서는 그녀의 계승의 반발하였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되지만,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내주는 대신 각 국으로부터 그녀의 승인을 인정받는다. 그녀는 후에 슐레지엔을 찾으려고, 7년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녀는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혼인하였는데,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자녀들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를 비롯하여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파르마의 공비 마리아 아말리아 등이 있다.
	
	그녀가 생전에 사용했던 칭호는 Königin(여왕)과 Kaiserin(황후)의 머릿글자를 딴 ‘K.K’이다.

title: 애덤 스미스
start: 1723-06-05
end: 179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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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영국, 경제학자,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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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둠 스미스 또는 아다 스미스(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다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남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어머니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심화를 제공했다.

title: 조지 워싱턴
start: 1732-02-22
end: 179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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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미국, 정치인, 군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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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년 2월 22일 ~ 1799년 12월 14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년~1797년)이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의 대국민들이 그를 국왕과 같은 군주로 인식하여 서로 거리감을 느꼈으나, 점차 미국의 건국과 혁명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으로 등극했다.
	
	1775년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을 때까지 총사령관으로서 복무하였다. 워싱턴은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하여야 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후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의 영국의 국왕인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787년, 조지 워싱턴은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를 주재하였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워싱턴은 해외 문제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택하였다. 1795년 워싱턴은 전쟁을 회피하고자 영국과 제이 조약을 맺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그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이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하였지만, 워싱턴은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하였다. 워싱턴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성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퇴임 연설에서 당파성과 파벌주의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의 가담 등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인 덕목을 강조하였다.
	
	워싱턴은 1799년에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title: 요제프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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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1809-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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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오스트리아,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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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년 3월 31일 - 1809년 5월 31일)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슈베르트와 함께 16살에도 소년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던 음악가이다.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 시대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ö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title: 프란시스코 고야
start: 1746-03-30
end: 182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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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스페인, 화가
description: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년 3월 30일 - 1828년 4월 16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 특히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title: 요한 볼프강 폰 괴테
start: 1749-8-28
end: 183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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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철학자, 정치인, 소설가, 시인, 극작가
description: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 ~ 1832년 3월 22일)는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이다. 바이마르 대공국에서 재상직을 지내기도 하였다.

title: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start: 1756-1-27
end: 17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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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작곡가, 작곡가
description: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는 오스트리아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출생 직후에 가톨릭의 성당에서 받은 세례명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였다. 흔히 알려진 중간 이름인 아마데우스(Amadeus)는 세례명에 있는 중간 이름 중 하나인 테오필루스(Theophilus)를 같은 뜻의 라틴어로 바꾼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볼프강의 누나인 난네를을 어려서부터 가르쳤고, 이를 볼프강은 지켜보았다. 세 살 때부터 볼프강은 누나를 보고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이 뚜렷이 빛을 발하게 되면서 작곡을 그만두었고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매우 뛰어났다. 난네를의 뮤직북에 쓰여진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볼프강은 네 살 때 여러 곡을 배웠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은 빠르게 발달하여, 다섯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믿지 못하여 일부러 모차르트의 집에 찾아와서 모차르트를 시험해 보았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가 모차르트의 곡을 써주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난 작곡 실력과 재능을 보였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모차르트를 믿기 시작하였다.
	
	1777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뮌헨, 만하임, 파리를 여행하였는데, 그 와중에 파리에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가운데에 볼프강, 왼쪽에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 오른쪽에 레오폴트 모차르트, 벽에 죽은 어머니의 초상화]]
	여행을 다니면서 모차르트는 많은 음악가들과 만났는데, 그중에서 1764년에서 1765년 사이에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바흐로부터 처음으로 교향곡을 작곡하는법을 배웠으며 이러한 토대로 모차르트는 사후까지 수많은 걸작의 교향곡을 남기는 중요한 계기가된다.

title: 루트비히 판 베토벤
start: 1770-12-17
end: 1827-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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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작곡가
description: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에는 〈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등이 있다.

title: 찰스 다윈
start:  1809-2-12
end: 188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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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영국, 생물학자, 지질학자, 박물학자
description: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FRS, 1809년 2월 12일~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뒤 저서 종의 기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진화론을 발표하여 논란이 되었다.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종의 기원》 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인간과 원숭이는 공통 조상을 갖는다'는 날짜=2012-01-26 그의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진화론과 창조론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

title: 카를 마르크스
start: 1818-05-05
end: 188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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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일, 교육자, 경제학자, 철학자, 혁명가
description: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title: 마크 트웨인
start: 1835-11-30
end: 19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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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미국, 소설가
description: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 1835년 11월 30일 ~ 1910년 4월 21일)는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필명으로 더욱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인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동화 《톰소여의 모험》이 있다.

title: 프리드리히 니체
start: 1844-10-15
end: 19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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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독일, 철학자
description: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ˈfʁiːdʁɪç ˈvɪlhɛlm ˈniːt͡sʃə, 1844년 10월 15일~1900년 8월 25일)는 독일의 철학자이며 문헌학자, 계보학자, 예술가이다. 그는 '망치를 든 철학자'이자 폭발적인 인간이다. 니체는 전통 사상들과 개념들을 대대적으로 재평가한 문화 비평가였다. 그는 가치론, 존재론, 미학, 윤리학, 심리학, 계보학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니체사상의 영향은 문화의 제반영역에 남아있는데, 특히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 영향이 강하다.
	
	니체는 젊은시절 그리스 고전 문헌을 연구했다. 24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문헌학 교수가 되었고, 교수 활동을 하며 그리스 고전 문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이 때의 연구가 후기 사상의 토양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의 저작으로는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등의 작품이 있다. 보불전쟁에 참전하여 질병을 얻고 평생 질환에 시달린다. 그로인해 1879년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이후 십년간 집필에 매진하여,《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등의 주요작을 남겼다. 1889년 초에 심각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여 이후 다시는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후 19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어머니와 여동생의 돌봄을 받으며 살았다.
	
	니체 이전의 서양전통에서는 세계를 이승과 저승으로 구분하여, 이승을 의미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저승을 '영원한 하늘나라' 혹은 '이데아 세계'라고 부르고 있었다. 니체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며 '지상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종용하였다. 또한 지상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폐적인 인간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나 '근본적인 가치'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허무주의자이다.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저편세계를 상정하는 모든 종류의 이상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노동자 천국' 등인데 특이하게도 민주주의를 기독교의 아류로 생각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반유대주의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인종주의자였던 여동생이 니체의 책을 조작하여,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 어용 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이용되기도 했다. 니체의 문체 및 진리와 가치에 대한 그의 질문들은 중대한 해석의 문제를 제기했고, 현상학과 분석철학 모두에서 방대한 2차 문헌들이 생겨났다.

title: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start: 1879-3-14
end: 195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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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미국, 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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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앨버트 아인스타인,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은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이다. 
	그의 일반 상대성이론은 현대 물리학에 혁명적인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21년 광전효과에 관한 기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title: 체 게바라
start: 1928-5-14
end: 1967-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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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쿠바, 정치인, 혁명가, 군인, 의사
description: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는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이자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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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단군
start: -2333 (조선 건국)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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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단군조선, 고조선,군주,신화, 무속,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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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檀君 또는 壇君)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한민족의 신화적인 시조이자 고조선의 건국자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시조로 추앙 받았으며 대종교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환검(桓儉)이라고도 한다. 단군은 직책으로 보이며 왕검, 왕험(王儉)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역사서중에 하나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나오는 한민족의 으뜸가는 조상의 이름이다.

title: 위만
start: -194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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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조선, 군주, 위만조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위만(衛滿, ? ~ ?, 재위: 기원전 194년경 ~ 기원전 2세기)은 중국 연(燕)나라 사람으로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위만조선의 초대 국왕이다.

title: 동명성왕 (주몽)
start: -58
end: -19-9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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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부여, 고구려,  왕,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동명성왕(東明聖王) 또는 추모왕(鄒牟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은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이다. ≪국사 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추모(鄒牟)’ 또는 ‘상해(象解)’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휘는 주몽(朱蒙)으로, 추모(鄒牟), 중모(中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도모(都牟), 도모(都慕)라고 한다. 시호는 "동명성왕"은 성스런 덕(聖)을 이은 왕(王)이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상해의 상(象)은 중(衆)자의 오기로부터 유래일 수도 있다. 부여의 건국자인 동명과 주몽은 별개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여의 금와왕 재위 시 금와왕의 아들 대소에 의해 핍박받던 주몽은 박해를 피해 남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title: 광개토왕
start: 374
end: 412 (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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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구려, 군주, 한국
description: 
	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2년?, 재위: 391년 ~ 412년?)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진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는 연호인 영락(永樂)을 왕호로 사용한 영락태왕(永樂太王) 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으로 알려져 있다.
	
	391년부터 412년까지 재위하는 동인 391년부터 411년까지 친정하였고 411년부터 이듬해 412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고거련(훗날의 장수왕)이 왕태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title: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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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신라, 화랑, 한국, 장군,가야, 왕족,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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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음력 7월 1일(양력 8월 18일))은 신라의 군인 겸 정치가이자 외척이었다.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眞平王)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후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title: 원효
start: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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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종교인, 신라, 승려, 학자, 왕족, 시인, 사상가, 철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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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title: 계백
start: 660-8-20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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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백제, 군인, 장군,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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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백(階伯, ? ~ 660년 8월 20일(의자왕 20년 음력 7월 9일), 일명은 堦伯(계백), 階升(계승))은 백제 말기의 장군이다. 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논산 황산벌에서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부여성충, 흥수와 함께 백제의 3충신이라 불리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title: 발해 문왕(대흠무)
start: 737(재위)
end: 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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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발해, 왕,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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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왕(文王, ? ~ 793년, 재위: 737년 ~ 793년)는 발해의 제3대 국왕으로, 휘는 흠무(欽茂), 연호는 대흥(大興)이다. 황후는 효의황후(孝懿皇后)로 룽터우산 고분군 M12 묘지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존호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다.
	

title: 김헌창
start: 822 (죽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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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신라, 왕족, 정치인,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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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창(金憲昌, ? ~ 822년)은 신라의 왕족이다. 태종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혹은 3남 문왕)의 4대 손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아들이다. 관등은 이찬이었으며 시중(侍中)을 역임하기도 했다.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도독으로 있으면서 신라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한 달만에 진압되었다. 그가 일으킨 반란은 오늘날 하대신라의 왕위 계승을 두고 그때껏 숨겨져 있던 모순이 폭발한 사건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title: 고려 태조
start: 877-1-31
end:  94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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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군인, 한국, 장군, 고려,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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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太祖, 877년 1월 31일 (음력 1월 14일) ~ 943년 7월 4일 (음력 5월 29일))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의 초대 왕(재위기간 :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약천(若天),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이다. 연호는 천수(天授)이다.
	
	송악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가 되었다.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의 상주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를 공략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 홍유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이 경주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와 병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경순왕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를 내려주고, 정승공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918년부터 943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918년 나주도대행대시중 구진(具鎭)과 국구 유금필(庾黔弼)이 잠시 순차적으로 대리청정하여 국정을 담당했고 같은 해 918년부터 943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title: 김부식
start: 1075
end: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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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려, 유학자, 문신, 작가, 시인, 한국, 역사가, 정치가,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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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부식(金富軾, 1075년 ~ 1151년)은 《삼국사기》를 쓴 고려 시대 학자·문신·역사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鄭襲明), 김효충(金孝忠)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title: 정서 (고려)
start: 1151 (대령후 사건)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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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한국, 고려, 문신, 시인,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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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서(鄭敍, ? ~ ?)는 고려 인종 때의 문인이다. 본관은 동래, 아명은 사문(嗣文), 호는 과정(瓜亭)이다. 
	
	고려사에 입전된 문안공 정항(鄭沆)과 개성 왕씨의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음서로 관직을 시작하여 내시원 내직(內直)이 된 뒤 내시낭중까지 올랐다. 
	
	인종의 왕비인 공예태후의 여동생이 바로 그의 아내인 관계로 인종과는 동서간이 된다. 글과 그림이 뛰어나 인종의 신임을 받았다. 
	
	1151년 의종 때 문관인 내시원 내직과 환관인 액정국 내료간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대령후 사건이 발생하자 내료의 거두인 정함·김존중 등의 모함으로 동래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연군의 정을 읊은 <정과정>을 지어 유명하다.
	
	그러나 조정내 문관계인 내직세력이 약화되어 점차 환관계인 액정국 내료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환관세력의 거두격인 내전숭반(內殿崇班) 정함이 문관세력인 내직세력의 힘을 완전히 약화시키려는 음모로 인해 다시 거제도로 귀양지를 옮겨야 했다. 
	
	1170년 명종 때 죄가 풀리어 다시 등용되었다. 

title: 김방경
start: 1212
end: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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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려, 무신,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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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경(金方慶, 1212년 ~ 1300년)은 고려 말기의 원종 때부터 봉공한 명장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이며 안동 김씨의 중시조이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김효인(金孝人)의 아들이다. 
	김사렴, 김사형의 4대 선조이다.

title: 최해
start: 1287
end: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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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려,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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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해(崔瀣, 1287년~1340년)는 고려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언명부(彦明父), 호는 졸옹(拙翁), 본관은 경주이다.
	
	최치원의 후손이며 충숙왕 때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을 지냈다.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검교·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그는 특히 고려의 저명한 문인들의 글을 모아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찬하였으며, 당대의 문호로서 이제현과 함께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졸고천백(拙藁千百)》《농은집》《귀감》 등이 있다.

title: 이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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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고려,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외교관, 시인, 역사가,서예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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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현(李齊賢, 1287년 ~ 1367년)은 고려후기의 시인·문신·성리학자·역사학자·화가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다. 

title: 조선 태조
start: 1335-10-27
end: 1408-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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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한국, 조선, 왕, 군인,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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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조(朝鮮 太祖, 1335년 10월 27일 (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18일 (음력 5월 24일), 재위 1392년 8월 5일 (음력 7월 17일) ~ 1398년 10월 14일 (음력 9월 5일))는 고려 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초대 왕이다. 함경도 영흥 출신이며,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고려에서 관직은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고려 우왕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문하시중으로서 전권을 장악하고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양위의 형식으로 조선을 개국하였다. 원래 이름은 성계였으나 조선건국 후 단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했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시호는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고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폐지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약 10년 동안 있었다. 향년은 74세이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title: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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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고려, 문신, 정치인, 유학자, 외교관, 철학자,조선, 성리학자,문인, 작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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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鄭道傳, 1342년~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무신(武臣), 유학자(儒學者)이자 시인(詩人)이며, 외교관(外交官), 정치가(政治家), 유교 사상가(儒敎 思想家), 유학 교육자(儒學 敎育者)이다. 조선의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三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별칭은 해동장량(海東張良)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과 제2차 요동 정벌(1392)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폄하되었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title: 조준
start: 1346
end: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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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려, 문신, 무신, 정치인,조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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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준(趙浚, 1346년 ∼ 1405년)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시인(詩人), 무신(武臣), 정치가(政治家)이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이다. 작위는 충의군(忠義君),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고 조연(趙璉)의 손자이며 판도판서를 지낸 조덕유(趙德裕)의 5남이고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의 부군 조대림(趙大臨)의 아버지이다.

title: 하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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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14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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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고려, 문신, 정치인, 유학자, 철학자, 시인,조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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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륜(또는 하윤, 河崙, 1348년 1월 22일(1347년 음력 12월 22일) ~ 1416년 11월 24일(음력 11월 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자는 대림(大臨) 또는 중림(仲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부사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다. 고려 말 정몽주, 남은, 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처음에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1393년 정도전이 쓴 표전문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홍무제가 문책하자 직접 명나라에 가서 사태를 해결하였다. 1398년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안대군 이방원을 도왔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당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1416년 관직에서 은퇴 후 객사하였다. 이인복, 이색의 문인이다.

title: 조선 세종
start: 139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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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문자 발명가,한글학자, 언어학자, 유학자,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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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7일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姓)은 이(李), 휘(諱)는 도(祹),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자(字)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이다. 세종은 묘호(廟號)이며, 조선에서 올린 시호(諡號)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므로 존시를 합치면 세종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 된다. 명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과 어머니 민씨(閔氏)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군 이보(孝寧君 李 補)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이제(李 褆)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沈溫)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 경제, 국방,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주시경(周時經)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에 출몰하는 여진족(女眞族)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倭寇)를 토벌하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붕어할 때까지 첫째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 인물이다. 2012년 7월 1일, 그의 묘호를 딴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가 출범하였다.

title: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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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의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title: 김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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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성리학자, 역사가, 교육인,갑자사화,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김일손(金馹孫, 1464년 ~ 1498년 7월)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禍)를 입었다. 

title: 조광조
start: 1482-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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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사상가,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갑자사화,기묘사화,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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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후에 기묘명헌 중 한 사람이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title: 유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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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정치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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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대 성리학 연구와 학술 진흥에 기여한 호남 사림
	
	유희춘(柳希春, 1513년~1577년)은 조선의 문신. 자는 인중, 호는 미암,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title: 이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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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기인(奇人)인가, 실학의 선구자인가
	
	이지함(李之菡, 1517년~1578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이다. 친형 성암 이지번의 문인이다. ‘토정’이라는 호는 그가 마포 나루에 ‘토정’이라는 흙집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인과 북인의 당수인 아계 이산해는 그의 문인이자 조카였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白玉軒) 이개는 이지함의 종증조부가 된다.

title: 김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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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159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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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동서 분당의 발단이 된 신진 사림의 영수
	
	김효원(金孝元, 1542년 ~ 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파 관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외척임을 들어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년 간 한직(閒職)을 전전했다.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직에 천거되자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심의겸과 심충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들로, 선조가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인정되었다.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교산 허균과 허난설헌의 인척으로, 허균은 그의 사위이며 허균의 형 허봉의 딸이 그의 맏며느리였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청렴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황, 조식의 문인.

title: 이이
start: 15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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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조선,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 서인, 노론, 문인, 한국, 교육자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2권
description: 
	율곡 이이의 구체제 혁신론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 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붕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 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휴암 백인걸의 문인이다.

title: 허준
start: 1539
end: 161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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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한의학,조선, 의사, 문신, 의학자, 한의사,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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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의학의 완성
	
	허준(許浚, 1539년 ~ 1615년)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생전의 관직은 숭록대부 양평군에 이르렀으며, 사후엔 정1품 보국숭록대부 양평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허곤(許琨)의 손자이며, 용천부사(龍川府使) 허윤(許碖)의 둘째아들이다.

title: 이순신
start: 1545-04-28
end: 159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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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무신, 제독, 장군,해군, 군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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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李舜臣, 1545년 (인종 원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 1598년 (선조 31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 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title: 조선 선조
start: 1552-11-26
end: 1608-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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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왕,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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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릉성세(穆陵盛世)의 중흥군주
	
	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임금(재위 1567년~1608년)이다. 성은 이(李), 휘는 연(昖),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첫 작위는 하성군(河城君)이었고, 사후 시호는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며 이후 광해군 때 묘호를 선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 올려서 최종시호는 선조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다.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아들로서, 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이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개인적으로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1567년 8월부터 1608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567년 8월부터 이듬해 1568년까지 이복 숙모 인순왕후 심씨가 섭정을 하였고 1568년부터 1608년까지 친정하였으며 같은 해 1608년 3월 붕어할 때까지 둘째 서자 광해군 이혼이 왕세자 신분으로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다.

title: 강홍립
start: 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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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군인, 장군,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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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청 교체의 격랑 속에서 고투한 경계인
	
	강홍립(姜弘立, 1560년 ~ 1627년)은 조선의 문관, 군인이다. 광해군 때 명나라에 지원병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청나라와의 교전을 피하다가 거짓으로 투항하기도 했다. 자 군신(君信), 호 내촌(耐村),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title: 허균
start: 1569-12-10
end: 161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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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ED%97%88%EA%B7%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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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조선, 문신, 정치인, 작가, 소설가, 유학자, 문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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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許筠, 1569년 12월 10일(음력 11월 3일) ~ 1618년 10월 12일(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 시인이었다. 서자를 차별 대우 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으며, 작품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성수(惺叟)로 불렸고 후에는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불렸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을 야기(惹起)하기도 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로 활동하였으나 1617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으로 가담하였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었다. 홍길동전과 성소부부고 등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는 동인이었으며 북인, 대북으로 활동하였다. 초당 허엽의 아들로, 허성의 이복제(異腹弟)이자 허봉, 허난설헌의 친제(親弟)이다. 우성전은 그의 이복 매부였다. 손곡 이달과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다. 동인의 초대 당수 성암 김효원(金孝元)의 사위이다. 강원도 출신.

title: 조선 광해군 start: 1575-6-4 end: 1641-8-7 media: mediathumbnail: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7401235556E69AC2F 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A%B4%91%ED%95%B4%EA%B5%B0 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조선, 왕, 한국 description: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전에 폐위되었기에 사후 시호는 없으며, 왕이었을 때 쓴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다.


title: 김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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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시인, 교육인, 외교관, 실학자, 성리학자, 철학자, 서인,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고집과 끈기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경세가
	
	김육(金堉, 1580년 ~ 1658년 9월)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작가이며, 효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 추진하였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썼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 관찰사에 재직 중 대동법을 제창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전후복구 사업을 시도하였고,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 등을 증보·재간행하였다.
	
	인조 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현감,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충청감사 재직 중 충청도 지역에서 시범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으며,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과 함께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 병조참판, 형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과 1645년 청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뒤 화폐의 주조·유통을 건의하여 평안도부터 추진하였고, 수레의 제조, 보급을 확산시켰으며,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을 건의하고, 《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1636년(인조 14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의 연경에 다녀왔는데,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마지막 공식 사신이었다.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화폐 이용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전사업을 건의, 민간에 주전(鑄錢)의 유통에도 성공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한국 최초의 태양력인 시헌력을 도입하여 양력 사용을 보급시키기도 했다. 1651년부터 1654년, 1655년부터 1658년까지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자(字)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고손자이다. 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 할아버지이며 김석주, 김석연의 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 증 청릉부원군 김좌명의 아버지이다. 정조의 장인 청은부원군 김시묵은 김육의 5대손이다. 조호익, 성혼, 윤두수, 윤근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김상헌의 문인이 되었다. 경기도 출신.

title: 송시열
start: 1607-12-30
end: 1689-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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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사상가,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 노론, 서인, 문신, 작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이상사회를 실현한 개혁자
	
	송시열(宋時烈,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행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과 윤휴의 3년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주요 이론가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1756년(영조 32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년(정조 11년) 조선 정조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회 이상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조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다.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이창,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title: 이중환
start: 1690-12-15
end: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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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정치인, 실학자, 지리학자, 성리학자, 철학자,풍수지리학자, 사상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굴곡 있는 삶, 시대를 앞선 사유
	
	이중환(李重煥, 1690년 12월 15일 ~ 175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사상가, 철학자이다.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이다.
	
	음서로 출사하여 통덕랑으로 재직 중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假注書)가 되고 그 해 승문원 부정자, 승문원 정자를 역임하였다. 이후 부사정 등을 거쳐 1716년 목호룡 등과 함께 숙빈 최씨의 묘지를 선정하러 전국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1717년(숙종 43년) 김천도찰방, 1719년 승정원 주서, 1720년(경종 즉위년) 춘추관사관, 성균관 전적, 1722년(경종 2) 병조정랑, 성균관전적, 1723년 병조정랑, 부사과를 역임했다.
	
	그러나 경종 때 목호룡이 노론 4대신이 경종을 폐출하려 한다고 고변한 신임옥사 이후 소론계로부터는 노론에게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공격당했고, 영조 즉위 후에는 노론으로부터 신임옥사 당시 그가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 준 것을 문제삼아 공격당했다. 목호룡 고변 관련자들을 국문할 때 함께 체포되어 구금, 국문당한 뒤 파면되었다. 이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전국을 다니면서 지리·사회·경제를 오래 연구하여 《택리지》를 저술하였다. 1753년 통정대부에 임명되었으나 요직에 중용되지는 못하였다. 1701년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이진휴의 아들이다. 성호 이익의 문인이자 그의 재종손이었다. 당색으로는 남인이었다.

title: 조선 영조
start: 1694-10-31
end: 1776-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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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왕, 군주,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조선성리학의 의리론을 주도한 군사(君師)
	
	영조(英祖, 1694년 10월 31일 (음력 9월 13일) ~ 1776년 4월 22일 (음력 3월 5일))는 조선의 제21대 임금(재위,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이다. 성은 이(李),  휘는 금(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원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며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다. 이후 고종 때 묘호를 높여 영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하여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 되었다.
	
	숙종(肅宗)의 서장자(차남)이며, 경종의 배다른 아우이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소생으로, 정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숙종 생존 시부터 잠재적인 계승권자였으며, 경종 때 왕세제로 책봉된다. 그러나 신임사화 등으로 위기를 넘기다가 경종의 급서로 즉위한다.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 악형 폐지, 서적 간행 등을 추진하였으나, 탕평론은 실패했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사형시키게 된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724년부터 1749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749년부터 1762년까지 아들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고 1762년부터 1775년까지 다시 친정 체제를 펼쳤으며 1775년부터 1776년 붕어할 때까지 손자 정조가 왕세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title: 신경준
start: 1712
end: 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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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실학자, 지리학자, 언어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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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과 실용을 중시한 국학자
	
	신경준(申景濬, 1712년~1781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로서,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庵),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title: 서명응
start: 1716
end: 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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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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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조대 학문 정책의 실무책임자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군수, 호는 보만재, 본관은 달성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에 대사헌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수군절도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역학에 통달했으며 실학 연구에 전력한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영조의 명으로 악보를 수집하여 《대악후보》를 간행했으며 글씨에도 능했다. 저서로 《보만재집》, 《계몽도설》 등이 있다.

title: 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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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정치인, 유학자, 철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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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정조 연간 실시된 탕평정국의 큰 기둥을 받친 남인 관료 정치가
	
	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영조 후반과 정조대의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강박과 오광운의 문인이며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자 세자궁의 측근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영조조와 정조조의 남인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측근이자 스승이었으며 세자의 사후에는 세손의 측근이었다. 정조 즉위 후 남인의 영수로 중용되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제도의 개선과 개정에 관심을 가졌고, 1781년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였으며, 가톨릭교에 대하여 온건 정책을 폈다. 1790년에는 영의정직의 공석으로 단독으로 국정을 보좌하기도 했다. 충청남도 출신.

title: 홍양호
start: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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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소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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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후반의 참보수
	
	홍양호(洪良浩, 1724년 ~ 1802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이조판서와 양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title: 서호수
start: 1736
end: 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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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천문학자, 과학자, 실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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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문학과 농학을 겸전한 전문가
	
	서호수(徐浩修, 1736년 ∼1799년)는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이자 실학자이다. 본관은 대구, 호는 학산(鶴山)이다.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의 아버지이며, 서명응의 아들이다. 정조의 신임을 받아 임종할 때까지 왕의 측근으로 활약하였고 규장각의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title: 조선 정조
start: 1752-10-28
end: 18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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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조선, 왕, 군주,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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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룩한 학자 군주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음력 9월 22일) ~ 1800년 8월 18일 (음력 6월 28일))는 조선의 제22대 왕이며 대한제국추존황제이다. 성과 휘는 이산(李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하였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을 등용,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벽파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노론이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노론, 특히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기간 중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음으로써 세도 정치의 씨를 뿌렸다. 박지원 등의 진보적 문장에 반대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켰고, 서인의 성리학자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를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능은 수원(水原)의 건릉(健陵)이다.

title: 이서구 (1754년)
start: 1754
end: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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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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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의 사림청론 정치가
	
	이서구(李書九, 1754년∼1825년)는 조선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낙서, 호는 척재,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대왕의 열두째아들인 인흥군(仁興君)의 후손으로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지평·경상우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1795년 정조 때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죄로 영해부에 유배되었다가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교정당상이 되어 왕명으로 <장릉지>를 편찬했으며, 1800년 순조 때 호조판서로 지실록사가 되어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대사헌·대호군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판중추 부사로 재직중 죽었다. 명문장가로서 특히 시명이 높아 박제가·이덕무·유득공과 함께 한시의 4대가로 알려졌으며 5언 고시에 능했다. 저서로 <서산집> <장재집> <여지고> 등이 있다.

title: 유신환
start: 1801
end: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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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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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림(山林)을 벗어나고자 했던 산림학자
	
	유신환(兪莘煥, 1801년 ~1859년)은 조선 말기의 학자이다. 자는 경형, 호는 봉서, 본관은 기계이다. 
	
	헌종 때 전의현감이 되어 선비들에게 소학을 가르치는 한편, 탐관오리를 처벌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홍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부터는 후진 양성을 위해서만 힘썼다. 그는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유명하다. 저서로 《패동수언》, 《동유연원》 등이 있다. 

title: 박규수
start: 1807-10-27
end: 187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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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문신, 정치인, 유학자, 실학자, 철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개화사상의 아버지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 군인, 외교관, 개화사상가, 철학자이며 화가, 지도 제작자로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로 승화시켜준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정계은퇴 후에도 김옥균,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다.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崔益鉉),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하였다. 
	
	1848년(헌종 14년) 증광시에 합격하여 출사했다. 그는 당시 여당 노론 내에서도 비주류인 북학파였지만 1862년(철종 13년) 진주민란을 진압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잇따른 난을 평정한 공으로 크게 승진하였다.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제학을 거쳐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의 하나인 대제학에 올랐고, 이후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지냈다. 1876년 수원부 유수로 재직 중 죽었다.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초명은 규학(珪鶴), 자는 환경(桓卿) 또는 환경(瓛卿), 정경(鼎卿)이라 했고, 호는 환재(瓛齋) 또는 환재(桓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을 썼다. 이정리, 이정관, 류화, 김정희의 문인이며 시호는 문익공(文翼公)이다.

title: 명성황후
start: 1851-11-17
end: 189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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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왕비,대한제국, 황족, 정치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수구본당인가, 개화의 선각자인가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추존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이다. 경기도 여주시 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녀는 급진개화파에게 고용된 일본인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title: 유길준
start: 1856-11-21
end: 191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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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갑신정변,조선, 문신, 정치인, 성리학자,개화파,문신, 개화 사상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갑오개혁의 이론가로 개혁을 주도한 최초의 일본 및 미국 유학생
	
	유길준(兪吉濬, 1856년 양력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 1914년 양력 9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이며 대한제국의 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성무(聖武) 또는 성무(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이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1870년(고종 7년) 박규수, 강위, 유대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박규수 사후에는 유대치와 강위, 오경석에게서 수학하였다. 1871년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번번히 대과에 낙방하고,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되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왔으며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직후 귀국하여 6년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나 김홍집 내각의 내무부협판과 내무부대신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당시 단발령을 전격 추진하였으며, 양력 사용, 신식 학교 건설 등의 개혁정책을 수립했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1900년(광무 3년)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외교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1905년(광무 8년) 11월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조선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다. 이후 계산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 계몽 등의 활동을 하였다. 국내 산업 자본의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흥사단의 조직과 1909년의 한성부민회와 청년학우회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의 한일합방 역시 반대하였으며, 한일 합방 무효 시위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총독부의 회유와 일본 정부가 준 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각종 저서와 계몽 강연을 통해 서구의 의학, 교육 등 신문명의 존재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사후 안창호에 의해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근대 최초의 한글 문법서이자 국어사전인 조선문전을 발간하였고, 10년간의 수정과 증보 후 1909년(융희 3년)에는 대한문전으로 재간행하였다. 또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소개한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와 이탈리아의 통일을 소개한 《이태리 독립전사》등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후배였던 윤치호에 의해 그 자신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출신 주요 공모, 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 노론 실학파 학자 박규수(朴珪壽), 개화 사상가 유대치, 오경석(吳慶錫), 강위(姜瑋) 등의 문하생이었다. 한성 출신.

title: 남궁억
start: 1863-12-27
end: 19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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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대한제국, 계몽운동가, 언론인, 독립운동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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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와 겨레 사랑을 실천한 민족주의자
	
	남궁억(南宮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은 대한제국 조선 왕조 말기의 교육자, 계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 사회운동가, 시인, 작사가, 작곡가, 언론인이다.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號)는 한서(翰西)이며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원적지는 강원도 홍천이며 한성부 출생인 그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노래들을 작곡하였으며 좌옹 윤치호의 사돈이기도 하다.
	
	1887년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종의 통역관이 되어 관직에 나갔으며 1894년 내무부 토목국장이 되어 경성부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아 완공시켰다. 또한 경성부내의 도로 정비와 도시 계획을 주도하였다. 그뒤 개화, 계몽운동을 추진하다가 1903년부터 성주목사, 양양군수(襄陽郡守)를 지냈으나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대한협회장,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계몽,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1910년 10월 한일합방 이후에는 배화학당 교사와 상동학원 원장을 겸하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으며, 신편언문체법(1914), 가정교육(1914) 등의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1918년 고향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여 교회와 학교를 짓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추진했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석방되었다. 성이 남(南)이고, 이름이 궁억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성이 남궁이고 이름이 억이다.

title: 서재필
start: 1864-1-7
end: 19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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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갑신정변,조선, 문신, 대한제국, 정치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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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 정신의 실천과 기독교 신앙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또는 미국 귀화명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Philip Jason)은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언론인, 군의관, 정치인, 의학자였다. 미국에서 해부학자, 의사로 활동했다. 본관은 대구이다.
	
	1882년(고종 20년) 과거에 급제,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 망명 생활을 했다. 1895년 귀국하여 독립 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參政權)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는데, 후일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의 개화 계몽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 체류, 대학을 다니며 의사로 활약했다. 이후 문구점과 상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이승만, 박용만, 안창호 등과 함께 재미한국인 교민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전후,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하면서 생계에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병원에 의사로 취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여 1945년 1월 미 의회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과도정부의 고문역을 역임하다가 1948년 출국 후 미국에서 병사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였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라 하여 그의 두 형과 부모는 자결했고, 옥에 갇힌 그의 본처 역시 자결했다. 당시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 역시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맏형 서재춘의 아들 중 살아남은 조카들과 동생 서재창의 유복자, 서재우의 아들 등이 혈통을 이어 그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시집간 큰누나와 누군가에 의해 구출된 여동생 서기석 등은 겨우 살아남았다.
	
	본관은 대구이고, 자(字)는 윤경(允卿), 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며, 영문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일명 “피제손” 이는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음역한 것이다. 또는 또는 제이슨(Philip Jason)이라고도 자칭했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堤仙) 또는 피제선(皮堤仙)으로 음역하였다. 필명은 오시아(N. H. Osia) 전라도 보성군에서 태어났지만,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에 있었고 논산과 대전에서 성장했으므로 충남 출신으로도 간주된다. 김성근(金聲根),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다.

title: 이승만
start: 1875-3-26
end: 1965-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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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공 건국과 분단 독재의 카리스마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스위스 등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발췌개헌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채 헌법을 두 차례 개정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58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으로 대표되는 언론탄압을 자행하였고,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통해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4·19 혁명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title: 김구
start: 1876-8-29
end: 1949-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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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정치인,대한제국, 승려, 독립유공자,백색 테러,한국
description: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교육자 겸 종교인,독립운동가 겸 통일운동가, 정치인이었다. 몰락 양반가의 자손 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승려로 활동했으며 이후 기독교에 귀의하였다.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한 개신교 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정부 내 노선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정치 자금을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나눠주던 김립을 암살했고, 자신의 부하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안공근의 암살 배후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해방 후에도 존 하지, 브루스 커밍스 등에 의해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송진우 암살 직후 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 때는 현장에서 한국독립당원이 검거되면서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을 받기도 했다. 또한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title: 한상룡
start: 1880-10-16
end: 194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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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일제 강점기, 관료, 금융인, 기업인,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친일파,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민족을 비월(飛越)한 사이비 근대인
	
	한상룡(韓相龍, 1880년 10월 16일 ~ 1947년 10월 30일)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 겸 금융인, 기업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와 고문을 지냈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title: 신채호
start: 1880-12-8
end: 193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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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학자, 역사가, 독립운동가,일제 강점기, 역사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절대적 자유를 꿈꾼 영원한 혁명가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사학자이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견해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title: 김규식
start: 1881-01-29
end: 195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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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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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건국훈장,대한제국, 교육인, 혁명가, 종교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김규식과 항일통일전선·좌우합작운동
	
	김규식(金奎植, 1881년 양력 2월 28일(음력 1월 27일)~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년간 외교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파리강화회의 참가 중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였고, 파리회담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하였으나 좌절당하였다. 1919년 3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로부터 전권대사와 외무부서장에 임명되었다. 4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파리대표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만주에서 대한독립군단의 지휘관으로도 활약하였고,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0년 다시 임시정부에 재입각,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당 주석직에 올랐으며,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광복 후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 에 나섰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견해를 수정,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3상결정 부분 지지와 미소공위, 좌우합작 당시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2월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金九),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나 48년 5월 귀환 후, 불반대 불참가로 입장을 바꾸고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초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총장, 파리위원장, 8월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1920년 학무총장, 1930년 8월 학무장, 11월 국무위원, 1932년 11월 국무위원 등을 지내고 1940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었다. 대중정치나 선동정치를 경멸하였고 정당활동을 기피하였으며, 정당활동으로는 민족혁명당 주석, 민중동맹 위원장,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등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가명은 '김성'(金成) · '김중문'(金仲文) · '김일민'(金一民) · '여일민'(余一民) · '왕개석'(王介石) 등이며, 별칭으로는 '변갑'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노론 중신인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의 방계 후손이었다.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이나 부친이 관리로 집무하던 중 태어난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이다.

title: 여운형
start: 1886-5-25
end: 1947-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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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조선 ,대한제국, 교육인,대한민국 임시 정부,일제 강점기, 목회자, 정치인, 언론인, 독립운동가
description: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安昌浩)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외교관으로는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했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노병회, 시사책진회, 중한호조사 결성에도 참여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으나 임정을 떠났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초중반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과 타스 통신사 직원으로 지냈으며, 국내에서는 1933년~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체육인으로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과 미군정기 군정청 체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했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십여 차례 당했으며, 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사후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여운홍의 친형이고, 철학자 박찬기의 외삼촌이다. 경기도 양근군(현재의 양평군) 출신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

title: 홍명희
start: 1888-5-23
end: 196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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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독립운동가,조선,대한제국, 독립운동가, 소설가, 작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혁명적이며 민족적이고자 했던‘중간 길’지식인의 문학과 정치적 선택
	
	홍명희(洪命熹,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부총리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9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산.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title: 안재홍
start: 1891-12-30
end: 196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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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조선,대한제국,일제 강점기,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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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운동과 신민족주의의 이론가
	
	안재홍(安在鴻, 1891년 12월 30일 ~ 1965년 3월 1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이며 언론인, 역사가이다. 일제치하에는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활동 주역이었으며, 조선어학회, 흥업구락부 등에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사회단체와 독립운동 외에도 사학자로서 고적지 답사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해방정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한성일보사 사장 등을 맡았으며, 1946년에는 우사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47년 2월 5일 미군정청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어 1948년 8월 15일까지 근무했다. 남북협상에는 소극적이었으나 남북협상 실패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인정, 대한민국 국기시정위원회 위원 등으로 참여했다. 1950년 5월의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나, 6월 25일 한국전쟁 때 조선 인민군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되었다. 아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진위군 출신.
	
	해방 후에는 중도우파의 지도급 정치가로서 자신이 정립한 신민족주의론과 신민주주의론에 입각하여 우파를 중심으로 좌파까지 망라하자는 이른바 민공협동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미소간 냉전체제가 고착되어가는 국제정세 하에서 중도파들의 민공협동론은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편이었다. 이에 안재홍은 이승만과 유엔과 미국이 제안, 지지하는 남한 단정수립론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변신하였다는 평이 있다.

title: 김백선
start: 1895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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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조선 ,의병장,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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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왕후 지지, 개화파 반대 활동을 했던 평민 의병장
	
	김백선(金百先, ? ~ 1895년)은 구한말의 의병장이었다. 별명 백선(伯善). 경기도 양평군 출생. 
	
	이명은 백선(百先). 경주 김(金)씨 십천공파 집안 출신으로 기개와 용력이 비상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지평(砥平)에서 일어나자 동향 사람이던 맹영재(孟英在)와 함께 포수대를 조직, 이를 토벌하였다. 맹영재는 그 공으로 지평군수가 되었고 김백선은 절충장군(折忠將軍)이 내려졌다.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항일 기운이 고조되자, 맹영재를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 때 마침 제천에서 이필희(李弼熙)·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1896년 1월 휘하 포군 4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함으로써 제천의병에 실질적인 전투력을 제공하였다.
	
	이어 같은 달 28일 유인석(柳麟錫)이 제천의병의 지휘를 맡아 부대의 편제를 정할 때 선봉장에 임명되어, 충주성전투 등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3월 27일 가흥(可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 진지를 점령하던 중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끝내 패퇴하게 되자, 원군을 보내지 않은 중군장 안승우에게 거세게 항의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군기를 문란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휘하 의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진을 동요시켜, 제천의병의 급격한 쇠퇴를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 내부에서 종종 발생하던 양반 유생과 평민 ·천민 간의 상하 신분 갈등 사건으로 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후손들은 김백선이 양반 출신이라는 점에서 상민으로 천시된 사건으로 보고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갈운리에 있다.

title: 김진구
start: 189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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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김진구_(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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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일제 강점기,학자, 연극인,야담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김옥균 숭배자의 혼미와 허망
	
	김진구(金振九, 1896년 12월 23일 ~ ?)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한국의 야담가다.

title: 윤보선
start: 1897-8-26
end: 19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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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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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대한제국,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대통령,일제 강점기,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꺾이지 않는, 그러나 시류에 흔들린 야당의 지도자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제4대 대통령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3일까지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부에서 대통령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 사퇴성명을 번복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과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친일파인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이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칭타칭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title: 우장춘
start: 1898-4-8
end: 1959-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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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대한제국,일제 강점기, 생물학자,농학자, 식물학자,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국적(國賊)의 아들'에서 '흥농(興農)의 아버지'가 된 세계적인 육종학자(育種學者)
	
	우장춘(禹長春, 1898년 4월 8일 ~ 1959년 8월 10일)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한국의 원예육종학자이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아버지의 오류가 한평생 짐이 되었으나 한국의 식물학과 농학을 이끌었다. 부산광역시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우장춘 기념관)이 있다.

title: 손진태
start: 190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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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일제 강점기, 역사가,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민속학자에서 역사학자로
	
	손진태(孫晉泰, 1900년 12월 28일 - ?)는 일제 강점기의 사학자, 민속학자로, 호는 남창(南滄)이다. 본관은 밀양, 경상남도 동래군 (현재의 부산광역시) 출신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를 신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연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27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1930년부터 1934년까지 동양문고 사서로 근무했다. 그 후 1932년에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였으며 1933년에 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했다. 1934년에는 진단학회의 발기인 가운데 하나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에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1937년에는 보성전문학교 초대 도서관 관장을 맡았다.
	
	광복 이후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194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1950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그는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에 납북되었으며 주요 저서로는 《조선 민족문화의 연구》, 《조선 민족사 개론》 등이 있다.

title: 김일성
start: 1912-4-15
end: 19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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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한국, 독립운동가, 군인,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파시스트, 정치인
description: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 지도자다. 본관은 전주. 1948년 9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12월 15일부터 1994년 7월 8일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때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북조선로동당의 소비에트 연방 대리자로 활동하였고, 남북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건 뒤 그해 4월 제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김구, 김규식 등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기망했고, 그해 6월 제2차 회의를 해주에서 개최하였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그해 9월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0년 소련의 스탈린을 설득해 그의 승인으로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국군과 UN군에게 패배하여 현재와 같이 남과 북으로 한반도를 나누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후 노동력 총동원(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파 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으며, 1972년에는 사회주의헌법을 제정,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1960년 이후 김일성은 주체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했다.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이 세습했다. 1994년 그가 사망하고, 1998년에 개정된 김일성헌법에서 정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김일성을 호칭할 때에는 그 이름앞에 최상의 수식어, 최상의 경어가 붙는다. 북한에서 김일성을 '어버이 수령님', '아버지 장군님'으로  호칭한다. 영국 인명사전에서 세계 10대 독재자로 선정 되었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였으나, 항일 무장 투쟁을 하면서 김일성으로 개명 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나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김일성 가짜설' 이 지속 제기되고 있어 김일성 실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검증이 필요한 사항이다
	한편 한국 전쟁 전쟁 범죄, 한국 전쟁 장본인 의혹,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개신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title: 김환기
start: 1913-2-27
end: 197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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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일제 강점기, 화가,대한민국,서양화가, 대학 교수, 한국
description: 
	김환기(金煥基, 1913년 2월 27일 ~ 1974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수화(樹話)이고,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생이다.
	
	1936년 일본 니혼 대학교 미술학부를 마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에 출품했다.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 1954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엠베지트 화랑을 위시하여 1957년 파리·니스·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초대 예술원 회원·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브라질로 갔고, 동 국제전의 명예상을 받았으며, 그곳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1964년 이후 부인인 수필가 김향안(金鄕岸)과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 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전후 14회의 개인전을 국내외에서 가졌고,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韓國美術大賞展)에서 대상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출발하여 동양적인 관조(觀照)와 아취(雅趣)를 근간으로 한 반추상(半抽象)의 세계를 보이다가 도미(渡美) 후에는 완전히 추상화풍으로 전환하여 옵티컬한 양식의 새로운 사조(思潮)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인다. 작품으로 〈산〉, 〈산월(山月)〉, 〈야상곡(夜想曲)〉,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다.

title: 박정희
start: 1917-11-14
end: 197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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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관동군,일제 강점기, 교사,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육군사관학교 동문,육군대학교 동문,대한민국, 군인, 장군, 정치인, 대통령,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한국의 1960·70년대를 독점한 인물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이며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육사를 57기로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일본 육사 출신 백선엽의 구명과 여순사건과 관련한 남로당 조직에 대하여 자백함으로써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이후 강제 예편된 박정희는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 등 민주화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으로 극명하게 나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평가,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아울러 의료보험제도 도입과 그린벨트 규제, 조림 사업, 산림복원사업 등을 추진했다. 반대 측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이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으로 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베트남 월남전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또한 박정희는 핵 개발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며,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title: 장준하
start: 1918-8-27
end: 197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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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사상가,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일제 강점기, 교육인, 군인, 광복군, 정치인, 한국,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description: 
	계몽과 저항의 생애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 ~ 1975년 8월 17일, 본관은 安東)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 쓰가다 부대에 자원 입대하였고,1944년 1월에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됐으나, 그해 7월 장쑤 성 쑤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군 중앙군 준위가 되었다. 1945년 쓰촨 성의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 광복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45년 11월 임정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공무원에 채용되어 서기관으로 임용되었고,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사상계》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장면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2013년 1월 24일에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title: 김수영
start: 1921-11-27
end: 196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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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credit: Wikipedia
groups: 대한민국, 시인, 한국
description: 
	김수영(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title: 김대중
start: 1924-1-6
end: 2009-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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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국민의 정부, 기업인, 대한민국, 정치인, 대통령, 한국
description: 
	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2000년 임기 중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고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국내외에서 오랫동안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했다.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 대내외적으로는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연설에 능하였으며,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로 비유되어 불렸다.

title: 노무현
start: 1946-9-1
end: 200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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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s: 대한민국, 판사, 변호사, 대통령, 해양수산부 장관, 한국
description: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았다.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직 권한이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항상 상회했으며 임기 내내 부동산 시장과 증시가 활황을 보였는데, 이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2.9%와 박근혜 정부의 2.8%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비슷한 처지의 싱가포르와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6.6%와 4.6%로 세계 경제가 호황을 누릴 때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부동산 투기 근절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IMF 사태 이후 악화된 소득분배가 노무현 정권에서도 그다지 개선되지 못했다는 점은 민심이반을 초래했고 이명박 정권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으로의 교체 원인이 되었다.
	
	주요 업적으로는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보수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재벌 총수들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 재벌개혁 중 하나인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 시행, 재벌기업들 사이의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도 강화한 것 등이다. 대통령이 자기 진영의 불법대선자금을 앞장서 밝힘으로써 정경유착을 상당히 완화한 것도 높게 평가받았다.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들이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고,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사후 1주일 동안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title: 김광석 start: 1964-1-22 end: 1996-1-6 media: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650284A556E627B24 mediathumbnail: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411DF4A556E627A04 mediacaption: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A%B4%91%EC%84%9D mediacredit: Wikipedia groups: 대한민국, 가수, 싱어송라이터, 한국 description: 김광석 (金光石, 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찾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이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6년 1월 6일 자살로 일생을 마쳤다. 대표곡으로는 〈사랑했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 〈그날들〉, 〈이등병의 편지〉,〈먼지가 되어〉 등이 있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08년 1월 6일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노래비는 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 세워졌으며 조각가 안규철이 제작했다 또한 2010년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행정명:김광석다시그리기길)가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시인 정훈교의 시(詩) 를 비롯한 다양한 벽화와 작품 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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